아침 해가 따스하게 내리쬐고, 혼자 멀거니 공원에 앉아 있던 미와는 손 안에 텅 빈 캔을 굴렸다. 아직 겨울이라기엔 이르고 가을이라기에는 늦은 때. 걸터 앉은 벤치는 누군가가 곧잘 누운 채 낮잠을 청하던 곳이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향한 곳이 여기였다. 들르곤 하던 자판기는 주스의 종류만이 바뀐 채 여전했고, 이제는 조금 더 작게만 보이는 공원 또한 세월을 그대로 지나 부드럽게 낡은 채였다. 아주 단단하지는 못한 사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짐짓 단단하게만 묶인 듯 하던 손목은 부드러운 천의 마찰에 금세 헐겁게 벌어지고 깜박 잠이 들었다가 깬 새벽녘에는 혼자 힘으로도 풀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어슴푸레하고 채도 낮은 새벽. 동트는 빛 아래에서 파랗게 파랗게 보이는 그 천을, 희게 질린 채인 이마를 가만히 번갈아보다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아직 고교생일 어느 무렵, 밤새 어울려 놀고 파이트를 하다가 그대로 묵었던 적이 있었다.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침대 위에서 잠들어 있었고, 카이는 그 곁에 상체만 엎드린 채 잠든 채였다. 깨우고 싶지 않아서 조용조용 일어나다가 살짝 움츠리는 어깨에 홀로 퍼뜩 놀라 도로 웅크렸다가 졸고야 말던 먼 기억. 너는 왜 이런 궂은 자리에서 굳이 낮잠을 청했을까. 그 때엔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이었다. 깨우러, 데리러 오는 누군가를 기다렸을까. 손 안에서 헛헛하게 빈 소리를 내며 구르던 캔은 포물선을 그리며 쓰레기통 안으로 낙하하고, 미와는 헛웃음을 웃었다.
손목에 아직 남은 채인 벌건 자욱. 너는 아직 기다리는가. 나는 여기에 누굴 데리러 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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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이란 그렇게 쉽게 실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카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줄곧 잃어 온 것이 그렇게나 많은데도 정작 그 순간에는 실감치 못하고 흘려 보낸 순간이 손 안에 다 잡히지도 못할 정도였으니. 굳이 고통에 비하자면 아주 둔하고 넓은 통증이라고 생각한다. 심박에 맞추어 느리게 퍼지는 둔탁한 아픔. 그렇게 생각하면 조금은 나았다. 결국 전부 잃을 것 중 하나였을 뿐이노라고. 혈육이 그러했듯, 어리던 친구가 그러했듯 그저 손 틈 새로 스륵 흘러나가고야 마는 것 중 하나라고 되뇌기로 했다. 속 안에 파도가 일었다. 달 뜨는 위치에 따라 깊었다가 얕았다가 하던 그 못이 발이 닿지 않도록 푹 꺼지고 중력이 사라졌다. 일견 덤덤하기까지 한 아픔이 짜갑게 밀려들고 그 때에 느리게 현실이 들이닥쳤다.
떠났다. 달 같던 사람. 밤에도 환하던 이는 지고 없었다. 얼굴을 가린 손 틈사이로도 먹먹한 어둠 뿐이었다. 밤 뿐인 나날을 살겠구나. 아침에도 어둡겠구나. 내 그림자가 드리운 월식은 끝나지 않겠구나. 한창 밝고 맑은 햇살이 영 무색하도록, 그렇게 카이는 혼자 고요히 앉아 밀려드는 고독 안에 잠김을 느꼈다. 발목까지 찰랑이는 고독과 무력감은 일종의 족쇄처럼 차디 찼고, 청명한 날씨는 비웃는 듯 했다. 카이는 그 어떠한 소리도 내지 않았다. 숨소리조차 자그맣게 잦아들고, 심장이 느리게 뛰었다. 월식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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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는 한참 거리를 걸었다. 가게 쪽으로 걸음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추억이 군데군데 서린 가게들 앞을 지나치며 생각을 했다가 말았다가만을 반복했다. 그 모든 생각의 틈새에 따갑게 박힌 영상이 있었다. 희게 질린 얼굴이 담던 외설스러운 빛. 짧은 순간마다 일렁거리는 동요함, 그 휘청이는 흔들림. 저도 모르게 손을 뻗으려고 움찔거려도 묶인 팔은 차마 그 뺨에, 어깨에 가 닿지를 못하고. 이 거리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던 모습. 그 파르랗던 교복 자락. 하이얗게 눈이 부시던 셔츠. 같은 색의 셔츠를 입은 채 자신 위에 가만 걸터 앉아 빛을 등지던 그 얼굴까지도. 한참을 생각했다. 그 흔들림을 자신이 붙들어 줄 수 있을지 하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정말로 그저 생각을 했다. 그 지난 날들을,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따갑게 저미는 애타도록 가여운 사랑스러움 너머로, 어떻게 해야만 그 불안정한 파동을 넘어 나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그렇게 하염없이 걷고 맴돌다가 우뚝 한 가게 앞에 걸음이 멎었다. 거리 곳곳에 추억이 진하게 스며있는데도 이 곳만큼은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없었다. 아마 들를 일이 없어서였으리라. 충동적으로 들어섰다. 짤랑이는 종소리. 상냥하게 맞는 점원의 인삿말. 미와는 탁 터져나오는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무의식이 준 답이라고 생각했다. 지갑을 가지고 나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에는 기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는 아직 잠든 채일까. 노곤한 몸으로 그대로 잠든 채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맨 먼저 눈 떴을 적에 보는 얼굴이 내 얼굴일 수 있도록. 그런 생각을 하며 값을 치렀다. 삑, 하는 카드 리더기 소리가 짐짓 유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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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한 번 물꼬를 튼 생각은 잔악하게 머릿속을 집어삼켰다. 그 곱던 추억들을 짓씹는 어젯밤. 자기 손으로 저지른 일들. 그 모든 일을 하도록 쉬이 길을 터 준 바닥 없는 허전함과 외로움이 삿대질을 하고, 어젯밤의 일이 반짝이다가도 저물기를 반복하며 점멸했다. 아예 스위치를 꺼 버릴 수만 있다면. 자리에서 일어나 무엇이라도, 그 어떤 행동이라도 한다면 그 순간부터 왈칵 밀려 들 상실감을 알았다. 몇 번의 경험이 남긴 교훈이기도 했다. 식사를 하고, 학교에 가고, 그런 가장 평이한 행동에서부터 상실은 이를 드러냈다. 방 안에 침잠하는 공기를 고스란히 들이마셨다가 내쉴 뿐, 카이는 그 자리에 가만히 있기만 했다. 시간이 필요했다. 얄팍한 거적데기나마 두르고 망연함을 맞이할 채비를 해야 했다.
문이 벌컥 열린 것은 그 순간이었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머릿속이 일시에 텅 비는 소리. 일견 우악스럽기까지 한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낯익은 그림자가 져 있었다. 신발을 벗는 소리. 부스럭거리는 소리. 코 끝에 끼치는 체향은 하루가 지나도 좀처럼 잊힐 줄을 모르고. 맨 먼저 한 생각은 우습게도 얻어 맞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분기에 차 도로 돌아왔는가. 친우를 농락한 것에 화가 치밀어 콧대를 분질러 놓는대도 할 말은 없었다. 더한 폭력도, 더한 멸시도 각오해야만 했다.
덜 여문 생각이 쓰게 터져 흐르고, 각오한 고통은 그 어느 곳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손이 잡혔다. 오싹한 감각. 처음 잡은 손은 아주 따뜻했고 또 단단했다. 절망을 아직 배우지 못한 척추에 짜릿한 황홀감이 내달리고, 스스로에게 역겨움을 느끼기도 이전에 안도했다. 이런 달콤함을 마지막으로 해 준다면 손가락 몇 개가 부러진대도 좋을텐데. 덤덤함을 가장한 채 바라본 시야에는 낯선 반짝임이 잡혔다. 싸늘한 감촉이 왼손 약지를 감싸고서야 알았다. 보름 같은 반지. 둥글게 손가락을 여미는. 아직 현실에 채 적응하지 못한 모양이었다. 서러운 무의식이 비춰주는 헛것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손에 힘을 주어서 깍지를 끼는 손가락이 있다. 손가락 사이사이가 버겁게 차는 감촉이 지나치게 생생했다. 침묵이 순식간에 부드러워졌다고 생각했다. 그 밀도가 연하게 헤쳐졌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나즉하게 도달하는 말.
“…넥타이 같은 건 풀릴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것으로 묶어두는 게 좋아.
상냥하게 일러 주듯, 무슨 대단한 비밀을 속삭이는 듯 아주 작고 보드랍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났다. 느리게 뛰던 심장에 일시에 확 불이 붙고 눈 앞이 어찔했다. 그러지 말라는 말이 잇새까지 치밀었다. 그러지 말라고, 제발 놓아 두라고 하고 싶기까지 했다. 자신은 망칠 것이었다. 이 상냥함도, 끝을 모르는 관대한 애정도 그만큼의 이기심으로 시커멓게 태워 버릴 텐데. 그게 곧 자신인데. 그럼에도 약지를 감싸는 빛은 눈이 일순 멀도록 찬란했고, 손을 감싸 쥔 손에는 온기가 가득 고여 넘치고 있었다. 카이는 다시 한 번 이기심의 손을 들어 주기로 했다. 가만히 눈을 감자 어깨까지 푹 잠기도록 휩싸는 따스함. 늘 등 뒤를 바라보아주던 그 온기 안에 기어코 다시 잠겨들 수가 있었다. 약지에 둘러 진 금속이 서로 마찰하는 감촉은 전혀 나쁘지 않았다. 내가 딱 두 걸음만 뒤로 물릴 수가 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귓가에 소근거리고 쏟아지는 작은 웃음소리가 일시에 신경을 풀어 놓았고, 카이는 느리게 눈을 떴다.
둥글게 맺어진 세계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시야에 돌아오는 세상은 다시금 완전했다. 허리에 감긴 팔이, 약지에 둘러진 원이 곧 구원이었다. 안도감을 닮은 숨이 뱉어지고, 맞잡은 손은 떠나질 않았다. 그제야 카이는 아주 작은 소리로 중얼거릴 수가 있었다. 좋아해. 다시금 느리게 눈을 감자 입술 위로 알고 있는 온기가 내려오고, 돌아오는 말은 가장 예쁜 원을 그리는 채였다. 나도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