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아야덴] 사랑의 꿈
브금지원: http://www.youtube.com/watch?v=KJg56uAacTs
심하게 오글거려여 주의해주세요....이상한 현대화도 주의^^!
여름방학을 목전에 둔 더운 날에도 음악실은 고요하고 서늘했다.
그 안에 피어오르는 묘한 종이 냄새며 먼지 냄새를 가만 맡고 있던 덴시치는 희게 몸을 드러낸 피아노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오랜 시간 사람 손을 타 온 피아노는 손가락에 힘을 들이지 않고도 맑은 소리로 대답했다. 덴시치는 희미하게 미소지었다. 열린 창문 너머로 운동장의 함성 소리며 모래 먼지가, 저물기 위해 뺨을 붉힐 준비를 하는 태양빛이 기웃거렸다. 페달을 밟는 리듬에 맞춰 희미한 하늘색 커튼이 나부꼈다. 덴시치는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살면서 이런 순간만 있다면 좋을텐데.
덴시치가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건 까마득할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였다.
상냥하고 조용한 피아노 선생님. 방 안에 가냘프고 맑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꽉 차는 피아노 음. 아직 어린 손가락을 뻗어 싸늘한 건반을 누르면 까르륵 웃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어린 덴시치는 그 소리를 따라 곧잘 웃었다. 자꾸만 내려가는 가는 손목을 조용히 도로 올려 주는 보드라운 손가락이며 피아노 위에 놓여진 주스 잔 같은 것들은 모두 거기에서 태어난 듯, 꼭 맞았다.
덴시치는 그 일부였다. 그 이상 완벽할 수 없었다.
어렸던 덴시치가 듣기에도 피아노 곡은 유달리 깨끗하고 고왔다. 어린 가슴 어딘가를 가만가만 흔드는 그 진동에 덴시치는 솔직하게 응답했다. 숙제를 마치고, 또래 친구들과의 모래장난을 마치고 나면 으레 덴시치는 피아노 앞에 가 앉았다. 그렇게 몇 해가 갔다. 악보대에 놓인 악보가 어느 새 복잡하게 얽힌 음표들로 그득 차고, 더 이상 모래장난을 하지 않을 무렵이 되었다. 덴시치는 가끔 피아노 방 앞을 지나며 생각했다. 이번주 주말엔 꼭 연습을 하자고. 그 향수에 잠긴 다짐은 당장 눈 앞에 높이 쌓인 할 일 앞에 무력했다. 덴시치는 어쩐지 가슴이 옥죄는 것 같았다. 그렇게 덴시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입학식 날이었다.
긴 설교를 되풀이하던 교장 선생이 문득 말을 멈췄다. 덴시치는 우수반에 들어갈 수 있었다는 안도감에 그 기묘한 침묵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조금 다른 내용의 연설이 이어졌다. 학교의 자랑, 학교의 보물이라는 선배들의 이름이 몇인가 불려지고 몇 명의 학생들이 앞에 나와 짧게 고개를 숙이고는 도로 들어갔다. 덴시치는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박수로 응답했다. 그리고 교장 선생이 잠시 머뭇대더니, 아까와는 다른 수식어를 붙인 선배 하나를 연단 앞으로 불렀다. 무슨 피아노 콩쿨에서 금상을 탔다고 했다. 이름이 불린지 한참이 지나고서야 그 선배는 연단 앞에 나갔다. 어딘지 무성의한 태도로 트로피를 건네 받은 그는 역시나 어딘가 무성의한 자세로 인사를 하고, 뭔가에 쫓기듯 후다닥 제 자리로 돌아갔다. 덴시치는 그 광경을 홀린듯이 바라보았다. 주위에서 소근대는 소리들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천재. 괴짜. 피아노. 3학년. 짧고 강렬한 단어들이 머릿속 건반을 일제히 두드렸다. 그 순간, 덴시치는 페달을 밟는 발 끝이 뻐근해질 때 까지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날 이후, 덴시치는 가끔씩 텅 빈 음악실에 들러 혼자 피아노를 쳤다. 아무 의미 없이 코드를 나열하는 날도 있었고, 아는 곡을 몇 번이고 되풀이하는 날도 있었다. 오늘의 덴시치는 기억 속에 희미한 곡들을 살며시 떠올리는 것으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사랑의 꿈. 그 복잡하고 사랑스러운 곡조에 진심으로 감동하던 어린 날이 다홍빛으로 청각을 휘감았다. 아직 손이 작고 손가락이 짧았던 덴시치는 차마 그 곡을 전부 칠 수 없었다. 한참을 분해하던 덴시치를 보던 피아노 선생님은 결국 주요 멜로디를 쉽게 풀어 새로 악보를 써 주었다. 곰돌이 스티커를 붙인 그 악보, 보드랍던 손으로 쓴 그 귀여운 악보를 생각하면 지금도 입술에 미소가 가득 담겼다. 그 때 피아노 선생님은 기뻐 방긋 웃는 덴시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었다. 리스트가 지금 너를 보면 정말로 기뻐했을거야.
덴시치는 희미한 기억 속에 남은 그 멜로디를 오른손으로 가만히 되짚었다. 손 끝에 따라 나오는 음률은 어딘가 불안정하고 위태로웠다. 덴시치는 그 완벽하던 순간에 가볍게 금이 간 것 같아서 속이 상했다. 그럼에도 그 곡조는 너무 고운 향수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덴시치는 굳이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나 틀린 음을 짚어도, 페달을 밟던 발 끝이 멈춰 있어도, 그래도 그 곡조는 그 존재만으로도 애닯게 사랑스러웠다.
거의 곡의 끝 무렵에 다달았을 무렵, 열린 창문 너머로 누군가가 훌쩍 뛰어들어왔다.
덴시치는 깜짝 놀라 손을 멈춘 채 그 사람을 가만 바라보았다. 덴시치가 알기로, 아무리 1층이라고 해도 음악실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정도의 위인은 전교를 통틀어 딱 한 명 뿐이었다.
"아...아야베 선배."
얘기 한 번 안 해본 저를 아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지, 아야베는 손을 대충 휘휘 젖고 성큼 걸어왔다. 덴시치는 그 기묘한 존재감에 머리가 멍해졌다. 대체 뭘 하다 왔는지 몰라도 아야베의 교복바지 밑단엔 흙이 잔뜩 묻어있었고, 머리는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었다. 덴시치는 소문으로만 듣던 그 천재 괴짜가 제 눈 앞에 있다는 사실이 영 믿기지 않았다.
"저기, 연습하실 거면 비켜드릴...."
"사랑의 꿈."
"네?"
"좋아해?"
"...아. 조,좋아해요."
그 말을 들은 아야베는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피아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덴시치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옆으로 물러섰다. 아야베는 가만히 덴시치를 보다가, 제 옆을 툭툭 쳤다. 덴시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더니 진짜였다. 덴시치는 그 위압감에 못 이겨 결국 아야베 옆에 앉았다. 곁에 앉자, 흙이며 풀 비슷한 물기 어린 내음이 훅 풍겼다. 그와 동시에 아야베는 연주를 시작했다.
아야베의 연주는 중압감 그 자체였다. 휘몰아쳤다가, 또 솜털같이 가볍게 스치다가, 어쩔 때에는 가슴 한 구석을 애절하게 물어뜯고 지나갔다. 내장 가장 깊숙한 곳까지 피아노 음이 진동이 되어 울려 퍼졌다. 머리가 먹먹해질 정도의 아름다움이었다. 그 경외에 가까운 감각에 덴시치는 말조차 잊은 채 가만히 그 소리를 듣고있었다. 그 연주 한 마디 한 마디가 정교하고 아름다운 송곳니가 되어서 가슴 속 가장 여린 부분에 다정하게 이를 박았다. 그 섬세한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그만 익사할 지경이 될 무렵, 연주는 멎었다.
덴시치는 그와 동시에 꾹꾹 참던 눈물이 주륵 흐르는 걸 느꼈다.
조금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돌리려는데 거친 손이 덴시치의 얼굴을 잡아 돌렸다. 덴시치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복잡한 심경이었다. 불쑥 들어와서 혼이 빠질 것 같은 연주를 하더니, 그에 감동받아 우는 얼굴이 창피해 숨기려니까 억지로 고개를 잡아 챈다. 이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수준이 아니라 아예 별세계에서 온 수준이 아닌가.
덴시치는 참았던 숨을 길고 가볍게 내쉬었다. 덴시치는 아직 연주의 여운이 남아 차마 입도 열지 못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아야베는 굳은살이 길게 잡힌 엄지 손가락으로 덴시치의 볼을 쓸었다. 중력을 타고 흐르던 눈물이 손가락에 쓸려 넓게 뺨에 퍼졌다. 덴시치는 간신히 눈물을 멎었다. 이 기묘한 상황이 불편해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 덴시치는 도로 입을 닫았다. 불쑥 코 앞에 다가온 아야베의 얼굴이 낯설었다. 뒤로 고개를 빼려는 순간, 입술에 따뜻한 체온이 스치고 지나갔다. 마치 지혈을 하듯, 입술을 짧게 눌렀다가 떼는 그 키스엔 떨림이라곤 일절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제야 아야베는 손을 뗐다. 어찌나 세게 틀어쥐었는지, 잡혔던 턱이며 뺨이 아직도 후끈했다.
덴시치는 얼이 빠져 도로 창가로 성큼성큼 걸어 가는 아야베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창틀에 다리를 올리던 아야베가 불쑥 뒤를 돌았다.
"내일, 또 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창틀을 훌쩍 뛰넘는 그림자에 딱 사랑스러울 정도의 노을빛이 번져 나왔다. 덴시치는 한참을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머릿속에 몇번이고 울려 퍼지는 그 곡을 생각했다. 모든 신경이 한데 목소리를 모아 노래하는 것 같았다.
사랑의 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