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교실 안, 파랗게 저물어가는 창 밖을 조용히 바라보던 덴시치는 책상 위에 풀썩 엎드렸다. 고개를 옆으로 괴고 제법 차게 식은 바람에 커튼이 한들거리는 모습을 하냥 보고 있자 한숨만 푹푹 나왔다. 팔 아래에 두툼한 문제집이며 프린트물들이 배겼다.
'다음 주까지 한다고 할 걸 그랬나.'
안도 선생님이 반 아이들에게 직접 출제한 문제를 모아서 문제집을 만들어 주고 싶으시다는 말에 기꺼이 도와드리겠다 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거기에 감기로 앓아 누운 히코시로의 일을 떠맡은 것과 곧 닥친 중간고사가 합쳐져 이런 결과가 돌아왔다.
팔 안에 묵직하게 들어찬 종이 더미를 본 안도 선생님이 천천히 해도 좋다고 하셨지만 덴시치는 고개를 저었다. 문제집은 시험기간 전에 완성해야 했고, 학생회 관련 서류는 히코시로가 낫기 전에 해 두어야 했으며, 중간고사 공부는 어차피 자기 일이다. 평소라면 사키치가 곁에 붙어서 도와주었겠지만 그러기엔 회계위원회 활동이 너무 바빴다. 혼자 덩그러니 남은 교실은 유달리 써늘하고 또 고요했다. 덴시치는 눈을 감았다. 손에 느슨하게 쥔 펜이 싸늘하게 식은 것이 영 거슬렸다. 몇 시간째 흰 종이만 바라본 눈은 지치다 못해 따끔거렸다. 이렇게나마 쉬어두는 편이 좋다는 건 오랜 공부 경험에서 체득한 팁이었다.
굳게 감은 눈꺼풀 너머로 온갖 생각들이 흘렀다. 그 와중에 유달리 마음에 걸리는 단어가 있었다.
고등학생.
앞으로 1년만 더 있으면 졸업을 하게 된다는 사실이 덜컥 들어찼다. 지금 앉아있는 의자도, 괴고 있는 책상도, 이 교실도 곧 영영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퍽 쓸쓸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된다면 이런 시간마저도 그리워할까. 내가 이 시절을 추억할 수 있을까.
덴시치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고등학생을 졸업한다는 명제 자체가 너무 낯선 탓이었다. 매일 이렇게 열심히 공부만 했는데 고등학생 시절이 뚝 끊겨버린다니, 좀 억울하다. 중요한 고 3시기를 마음 놓고 보낼 수도 없고 지난 1학년은 이미 고등학교 공부를 따라가느라 허비해 버렸다. 가장 슬픈 건 백번이고 천번이고 생각해도 바뀌지 못할 자신이었다. 하다못해 어릴 때 맘껏 놀아둘 걸 하는 뒤늦은 후회가, 졸업 한 후에도 학창시절을 그리워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저녁 공기에 물러진 마음을 에었다.
우울한 생각으로 먹먹해진 고막에 드륵 하고 문 여는 소리가 내려 앉았다. 덴시치는 일어나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 옆자리에 털썩 앉는 모양새에 사키치가 벌써 돌아왔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 품에서 묘하게 익숙한 향기가 났다. 펜을 쥔 손가락이 일순 굳었다. 낯설고 마디가 진 손가락이 머리카락 위를 살짝 스쳤다.
나는 왜
눈을 뜨지 못할까.
머리카락 위를 고요히 맴돌던 손가락은 결국 솜털같은 온기만 남긴 채로 거둬졌다. 그 손은 곧 멀어졌다. 빠끔히 열린 창문을 닫는 소리가 났다. 억지로 소리를 줄이려고 노력하는 모양새가 감은 눈 너머로도 전해졌다.
너는 왜
나를 깨우지 않을까.
그 인기척은 창문을 닫더니, 도로 살금살금 곁에 다가왔다. 빤히 얼굴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굳은 살이 단단하게 박힌 손 끝이 감은 눈꺼풀 위를 가볍게 스쳤다. 그 손가락은 곧 느슨하게 풀어진 손가락 사이의 펜을 살금 빼 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그 빈 틈새에 다른 무언가가 채워졌다.
방금 분명히 웃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그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왠지 알 수 있었다. 그 인기척은 가벼운 웃음을 끝에 매단 채로 천천히 교실을 나섰다. 미닫이문이 조용히 닫기는 소리에 맞춰 감긴 눈이 열렸다. 손가락 안, 내내 잡고 있던 펜을 대신한 물체가 천천히 보이기 시작했다.
얼마나 손에 넣고 쥐었는지 구깃한 주름이 가득한 커피믹스 한 봉지.
덴시치는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 이 미소는 아까 네가 끝끝내 지우지 못한 그 웃음과 닮아 있겠지. 곁에 둔 물컵이 마침 비어 있었다. 덴시치는 그 끝을 천천히 뜯었다. 감은 눈 위를 스치던 손끝이 몇 번이고 매만졌을 그 끝은 쉬이 튿어졌다. 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훅 풍겼다. 단숨에 그 봉지를 거꾸로 하자, 안에 든 가루들이 오소소 컵 안으로 비행했다. 맨 마지막에 쏟아지는 설탕들이 형광등 빛을 받아서 반짝거렸다. 덴시치는 조용히 일어났다. 살금살금 문을 열고 고개를 기울여 내다 보자, 정수기 근처에 삐딱하게 기댄 사람이 한 명 보였다.
뜨거운 물만 넣으면, 10분동안은 작은 천국이야.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은 손에는 덴시치가 온종일 쓰던 펜이 쥐여져 있었다. 살금 다가가서 그 등을 톡 치자, 돌아보는 얼굴은 예상한 그대로였다. 덴시치는 그 얼굴을 따라 웃었다.
연성사담 : 달달하게 연애하는 헤이덴도 좋아요. 대놓고 연애하는 게 아니라 평소엔 인사나 좀 하고 덤덤하게 학교생활 하면서 사실 둘만 있으면 달다 못해서 당뇨 걸릴 것 같은 관계가 급 끌려서...이런 게 나왔네요...딱히 터부라기보단 조용하고 담담한 작은 비밀같은 연애를 하는 둘이 맘에 드네요. 함정 포인트는 사키치랑 란타로랑 단조는 알 것 같다는 거?그렇지만 모두 모른 척 하면서 조용하게 연애했으면 좋겠어요. 물론 비글돋게 깨발랄 연애하는것도 좋지만 이런 것도 전 좋아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