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카이] 7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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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인설정 → 카이가 마일드한 저혈당&저혈압, 미와가 담배 피웁니당
오후라고 해서 딱히 떨어져 지내는 것은 아니다. 학교가 파한 후에도 부활동의 이름을 빌려 몇 시간이고 같이 시간을 보낸 이후에야 집에 돌아가고는 한다. 하굣길도 물론 같이 발을 맞춰 걷는다. 아주 늦는 시간까지 어느 한 쪽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도 잦고, 밤이 아주 늦은 각자의 시간에도 메일 따위를 주고 받아서 말 그대로 잠들기 직전까지 어떤 식으로건 시간을 공유한다.
평일이건, 주말이건, 심지어는 긴 방학이나 명절 때에도 서로를 보지 않고 내리 며칠 이상을 보내 본 일이 드물었다. 미와는 가끔 생각했다. 이런 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심술 비슷한 서러움이 왈칵 치미는 때도 분명히 있었다. 내가 아침에 너를 데리러 가지 않는다면, 하교길 뒷모습을 배웅하지 않는다면 조금은 서운하게 생각해 주긴 할까. 혹은 그만큼의 외로움을 견디다가 먼저 손을 뻗는 날이 오기는 하는 걸까.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아직 어렸고, 감정도 그만큼 미성숙하기 짝이 없었다. 친구라는 이름을 빌려 곁을 차지하고 시간을 쓰는 것에 언제 한계가 올 지 몰랐다. 아마 자신은 꾸역거리고 얼마든지 이런 나날을 이어가도 좋다고 각오할 수 있겠지만, 글쎄. 과연 카이도 그런 생각에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는 걸까.
스스로가 한 생각에 스스로 베이고 찔려서 너덜너덜한 밤이 있다.
그만두는 게 좋을까. 천천히 거리를 벌리면 어느 쪽도 흉 지지 않고 끝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그런 일을 시작하기엔 배짱이 턱없이 모자랐다. 거리를 벌렸을 때, 그럴 때 카이가 다시 이 쪽으로 두어 걸음 걸어오지 않는다면 그 때의 충격을 버텨 낼 자신이 도통 없었다. 밤의 메일이 전파를 타고 쭉 뻗고, 불도 켜지 않은 어둑한 방에 멍하니 누워서 창문을 넘어 드는 싸늘한 공기를 들이 마셨다.
당장 이런 작은 것이 그랬다. 메일을 먼저 보내지 않은 적이 있던가.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다가 잠드는 새벽도 간혹 있었다. 첫 일년간은 그저 기뻤다. 친했던 친구가 돌아오고, 시간과 정성을 들여서 겨우 곁에 다시 섰다. 어떤 애매한 색으로 깊어지는 줄도 모르는 채로 섬세한 모서리에 느리게 맞추어 나갔다. 느린 소모전이로구나 하는 걸 깨달은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차라리 모르던 때로 돌아가기를 바라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리고 새로 들인 습관. 밤의 메일에 자꾸만 말하기 힘든 것을 적어 내려는 짓궂은 기분을 억누르는 못된 친구가 생겼다. 입술에 부드럽게 닿는 필터는 종이라고는 믿기지 않도록 매끈했다. 찰칵, 하고 겨우 귀에 익기 시작한 소리가 적막한 방 안을 쓸쓸하게 울렸다. 폐 안쪽 구석구석까지 뜨끈하게 달구었다가 단숨에 빠져 나가는 연기는 잘 아는 사람을 닮았다. 잡으려는 게 멍청한 거지. 입술 사이로 아마 영영 하지 못할 말들과 함께 맥없이 흘러 나간다. 창문 밖으로 쉽게도 흘러 나가서 영영 흩어지고 마는 회백색 연기는 조금 부럽기까지 했다. 동시에 휴대폰 불빛이 깜박였다. 답문 없이 대충 잠들려던 마음은 그 기계적인 깜박임 앞에서는 종잇장보다도 무력한 심술이었다. 길게 한 모금 분의 연기가 더 뱉아지고, 미와는 찌푸림 반, 미소 반을 섞어 둔 이상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두드렸다. 미련하다. 앎에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담배랑 참 닮은 것이다. 암 걸릴 것 같은 기분도 포함해서. 쓴 미소가 소리가 되어 잠깐 퍼져 나가고, 빨갛게 타던 담뱃불이 꺼지고서야 방 안은 완전히 어두워졌다.
"스탠드 앤 드로."
파이트를 하는 모습은 질리도록 봐 왔지만 신기하게도 질리지를 않는다.
미와는 턱을 괴던 손을 바꾸어 괴었다. 모르는 새에 꽤 집중해서 보고 있었는지 손 안쪽에 차가운 땀이 스며 있었다. 좋은 모습이다. 집중하는 모습. 카이가 매료에 가까운 집중도를 보이는 대상. 살다 살다가 무생물, 아니 카드게임에게 존재가 밀리는 기분이 들다니. 미와는 픽 웃으며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그것을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카이의 파이트 상대를 하고 있던 카무이가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하는 것이 고막이 아프도록 들렸다. 그 쪽을 보고 웃은 건 아닌데 말이지. 미와는 대충 손을 흔들어 주었다. 곧 익숙한 소리가 들릴 것이다.
파이널 턴. 봐, 그치. 오만에 가까운 말이 저 입술을 타고 나올 적마다 괜시리 제 척주 끄트머리가 근질거렸다. 정작 카이는 자신과 파이트 할 때엔 좀처럼 그 말을 뱉지 않았다. 그래서 남과의 파이트를 보는 건 배로 즐거운 일이었다. 카드나 전술에 집중하는 대신 완전히 카이만 바라본 채로 시간을 보내도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다. 누가 들으면 경찰에 신고할 지도. 조금 더 입 꼬리를 올려 웃자 카무이가 길게 소리를 질렀다. 미와는 한 번 더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늘 인기가 죽여주네. 정작 이 쪽은 보지도 않고 카드만 들여다 보는 사람이 있지만, 거기까지 매 순간 신경 쓰다가는 정말로 암에 걸리고야 말 것이다. 죽고 나면 몸에서 주먹만 한 종양들이 몇 개나 나올지도 몰라. 그런 생각을 하며 곤란하게 웃는 아이치를 따라 웃었다.
오후는 잘, 그리고 빨리 간다. 이 속도로 밤도 갔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이제 지겹기까지 했다. 그래서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파이널 턴. 속으로 한 번 따라 읊어 보았다. 역시 같은 모양새는 안 나오겠구만. 딱히 싫진 않은 사실이었다.
연전연승. 일견 오만하다고까지 보일 수 있는 태도 뒤에는 뒷받침이 되는 실력이 있다. 좀처럼 운에 기대지 않고 맹공을 퍼붓는 플레이 스타일. 파괴적이기까지 한 스타일은 파이터라면 한 번쯤은 마른침을 삼키며 동경해 볼 법도 하다. 이름 앞에 붙는 귀신과도 같이 강하다는 수식어. 여느 카드샵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 만으로 주목을 받는 것 또한 숨기지 않는 실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런 것도 좋지. 미와는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그런 것도 좋다. 부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다른 것도 좋아한다. 보고 있으면 어금니 안쪽이 괜히 간질여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트리거를 뽑을 때의 표정. 카드를 짚는 손가락 끝. 상대를 똑바로 관통하듯 바라보며 하는 말들. 파이트의 상대가 아닐 때에 보이는 것들도 분명히 있는 법이다. 시침이 빠르게 간다. 그 새에 너덧 번은 파이트를 했을까, 만족한 듯 덱을 챙겨 품에 넣는 모양새가 이제는 돌아가려는 것 같다. 미와는 그 모습을 따라 보며 픽 웃었다. 어째 저째 오후가 흘렀다. 싫은 밤을 앞두고도 헬멧을 받아 드는 모양새는 퍽 마음에 든다. 암, 이미 걸렸을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시동을 걸었다. 하늘이 흐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