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카이] 72% (5)
동인설정주의
껄끄러운 기분. 왠지 그냥 일 없이 불안했다. 어제부터 몸을 휘감고 떨어지지 않는 조바심 가득한 생각은 비가 남기는 습기처럼 눅진하게 머릿속을 짓누른다. 그냥 말해버릴 것만 같은 기분. 그냥 아무렇지 않게, 그냥 정말로 평범하게 같이 점심을 먹다가, 혹은 같이 파이트를 하다가도 숨쉬듯 흘러나와 버릴 것 만 같았다. 무턱대고 달콤한 상상에 사로잡히기에는 도저히 현실을 무시할 수가 없다. 안 그래도 간신히 유지한다고 믿는 거리가, 단숨에 와장창 무너져 멀리 가 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학교에 있는 내내 불안감에게 뒷목을 꼬집히는 기분이었다. 괜히 카이 쪽을 슬금 보았다가 한숨 몇 번 푹 쉬고, 괜히 노트 필기에 열을 올리는 척을 하느라 진이 쭉 빠지고 말았다. 밖은 아직도 흐린 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침보다는 수그러든 빗줄기. 평소라면 부 활동을 하러 같이 갔겠지만, 급격한 피로감에 도저히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동시에 기껏 잦아든 감기가 스멀거리고 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목 안쪽이 따갑다. 목소리 끄트머리가 다시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습게도, 이거라면 도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새 가방을 전부 챙긴 건지, 자리 앞에 가만히 선 그림자가 낯익다. 말없이 재촉하는 것이다. 간신히 미소를 띄워 올리며 말을 붙였다. 목소리가 조각 나서 울렸다. 빗소리에 군데군데 먹혀 들어가고야 마는 낮은 음. 자기 목소리가 아닌 것처럼 어색하기만 했다. 요즘의 감정처럼, 스스로의 것인데도 괜히 어색해서 몸서리 치게 되는 것이다.
“미안, 아직 좀 아픈 것 같아서.”
카이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보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맞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 두는 편이 정신건강에 좋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대답이 조용조용 귓가를 맴돈다.
“……양호실. 데려다 주지.”
딱히 그럴 건 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학교는 파한 이후이고, 곧장 집에 가면 된다고 하려다가 그만 입을 딱 닫고 말았다. 오늘 우산이 하나뿐이 없구나. 먼저 후닥닥 돌아가 버린다고 하면 아주 잡지는 않겠지만, 폭삭 젖어 집에 돌아 갈 카이를 생각하면 역시 마음이 쓰였다. 미와는 몰래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내 몸 아파 집에 돌아가겠다는 것보다도 저 녀석이 비 맞는 게 신경 쓰이다니. 완전히 글렀다. 이쯤 되면 차라리 우습다. 어디까지 멍청해 질 심산인지 아예 오기를 담아 팔짱을 끼고 바라보고 싶기까지 한 심경이었다. 미와 타이시야, 넌 진짜 머리가 안 좋구나. 스스로에게 암만 그렇게 말해 봐야 이미 늦었다. 카이가 등을 돌리고 뒷문을 향해 걷기 시작하고, 대충 챙겨 둔 자기 몫의 가방까지 들고 걷는 걸 보며 다시금 발이 푹푹 빠질 뿐이다. 학습능력이라고는 없는 이 반복의 굴레 속에서 끝이라곤 없이 마냥 허우적대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차라리 고개 젓고 돌아갔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의미 없이 몇 번이고 반복하면서 카이의 등 뒤를 따라 걷었다. 그림자가 가는 듯 희미하게 맺히고, 양손에 나눠 든 가방을 도로 낚아 채고 싶지만 손 끝이 닿을까 봐 두렵다. 차마 도망친다는 인상을 남기기에는 마음 귀퉁이가 신경쓰여서 견딜 수가 없다. 너에게서 도망간다는 그런 낌새를 보이면, 실상이야 어떻건 꽤 안쓰럽다고 생각해 버릴 것만 같아서. 그래서 결국 한층 더 푹 깊게 잠길 것만 같아서. 이미 한참을 늦었다고 생각해도, 그런 생각에는 끝이 없는 법이다. 양호실 문을 거리낌없이 여는 흰 손가락. 언젠가 그 매듭 같은 흰 색에 눈이 멀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조금은 기대하면서.
양호 부원도, 양호 선생님도 없는 양호실은 적막하기 짝이 없었다. 혹시 몰라 미리 챙겨 온 감기약을 두어 알 집어 삼키고는 침대에 앉은 채로 카이를 배웅했다. 흘긋 이쪽을 보면서 침대 머리맡에 놓아 둔 휴대폰을 말 없이 가리킨다. 상태가 안 좋아지면 메일 하라는 무언의 표시인 것이다. 카이는 곧잘 손가락 끝을 입술 대신 써서 의사표현을 하곤 했다. 이미 익숙해진 일이다. 그게 조금은 서운했다. 그게 익숙해 졌다는 게, 그럴 만큼 내가 너를 귀찮게 한 걸까 싶은 막연한 불안감에 머릿속 꼬인 채인 올이 팽팽해진다. 드륵, 하는 소리가 카이의 뒷모습을 가리기가 무섭게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잘 안다. 과묵한 건 성격일 뿐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냥 괜히 불안하고 괜히 서운하고. 기분이 빗줄기 따라 널을 뛰었다. 들어 줄 사람이 있는데도 과묵하다는 건, 내겐 할 이야기가 없다는 걸까.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눈을 감았다. 베갯머리에 놓아 둔 휴대폰을 뒤집어 둔 것은 일종의 작은 심술이었다. 피곤한 몸 위에 잠이 쉽게도 쏟아졌다. 저항할 이유가 없다. 감은 눈 너머로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멀어져만 갔다.
미와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었다. 어릴 적엔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찬 이후에는 좀처럼 꾸지 않았다. 꾸어도 별로 반갑지는 않았다. 주로 카이를 가만히 바라보는 꿈일 뿐이어서, 깨고 나면 차라리 기분이 한없이 수직하강 하기 마련이었다. 부정하려고 애쓰고, 도망치려고 필사적이던 때에는 잠들고 싶지 않기까지 했다. 어느 정도 그 끄트머리를 놓아 버리자 차라리 꿈이 달아났다. 좋은 요령이라고 생각했다.
빛 바랜 듯 희미하게 엷은 색이 깔린 꿈이었다. 꿈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꿈이구나. 꿈 속은 꽤나 칙칙한 잿빛이 한 층 연하게 깔린 모양새였다. 옛날 기억인가 보다. 시선을 옮기자 어린 시절의 스스로가 보였다. 옷차림이 이상했다. 자주 입던 후드 티는 어디로 가고, 어색한 양복 차림이었다. 그것도 검은 색.
아.
일순 머릿속이 쾅 하고 흔들린 기분이었다. 초등학생이 검은 양복을 입고 갈 만한 곳은, 미와의 기억 상에 딱 한 군데 밖엔 없었다. 울적한 얼굴로 흰 꽃송이를 들고, 반 친구 하나와 함께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안 된다고, 제발 그러지 말라고 바짓가랑이를 잡아 이끌고 싶었다. 이런 상태에서 그 어리던 카이를 다시 마주하면, 그런다면 정말 속절없이 뿌리까지 무너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 가엾던 모습을 다시 보는 것 만으로도 머릿속 어딘가가 너덜너덜 찢어져서, 그래서 그만 모든 말이 주르륵 새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러지 마. 기억을 더럽히지 마. 암만 외치고 생각해도 꿈은 야속하게도 흘러간다. 그 날과 꼭 같은 순차로 차근차근 걸음을 옮겨 간다.
코 끝에 맵게 끼치는 선향 냄새. 국화꽃 냄새. 아득하게 들리는 경 읊는 소리. 그만. 제발. 빌고 빌어도 가혹하게 재생되는 기억. 작게 움츠린 채 서 있는 등을 보았을 땐, 아예 탁 놔 버린 기분이었다. 어떻게 잊을까. 맨 처음 너에게 발목이 빠지기 시작한 날을. 돌이켜 보면 이 때였다. 언제 보아도 한없이, 바닥도 없이 가엾고 그만큼 사랑스러운 기억. 가슴이 미어지는 만큼, 그 패인 자리에 차오르는 존재감. 창백하도록 흰 꽃을 불단 옆에 가만가만 놓아 두고, 멍한 머릿속을 간신히 붙들고 너를 보았다. 등을 돌린 채 서 있던 네가 느리게 돌아 보던 그 순간.
공명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중학교에 가서야 알게 된 그 단어에 그만큼 놀란 적이 없었다. 유리잔이 일시에 웅 울리듯. 비슷한 음색이 단번에 쩡하니 꿰뚫듯. 부어 있지도 않은 눈가, 눈물기 없는 마른 얼굴. 그럼에도 알 수 있었다. 무의식의 가장 깊은 곳까지 확실히 닿았다. 슬픔. 불안함. 복잡하고 무딘 아픔이 묵직하게 옮아 들어왔다. 조부모로 보이는 어른 둘이 나가 있어도 괜찮다는 듯, 카이의 어깨를 살짝 밀듯이 이 쪽으로 두드리고, 카이는 쭈뼛대다가 결국 이 쪽으로 향했다.
말 없이 걷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마 그 때는 카이를 토시키라고, 이름으로 불렀던 것 같은데. 그것만큼은 좀처럼 기억이 나질 않았다. 닿을 듯 말 듯 손끝에 살짝씩 스치며 지나는 네 손 끝이 지독하게 차가웠다. 아직 보드랍고 덜 여물었던 그 손 끝. 그 때에도 고민했었다. 쥐어야 하는 걸까. 한 줌 손 안에 꽉 찰 것 같은 손가락. 잡아주지는 못했다. 대신 자판기 음료를 건네는 카이를 빤히 보다가 울었었다. 탁 터져서 흐르는 눈물은 생경한 감각이었다. 그 때 다시 느꼈었다. 감정이 다시금 뒤섞여서, 그래서 네 쪽으로 흘러 간다고. 뭐라고 이름 붙이지도 못한 강 같은 흐름이 그 때엔 확실히 있었다. 공명. 그래. 소리가 울리듯. 일시에, 단숨에 흐르는 것들. 그리고 천천히 카이의 창백한 얼굴이 일그러지듯, 찌푸려지듯 하다가 결국 눈물이 고이고 비처럼 떨어지고 하는 걸 보고 있었다. 같이 울어 버리느라 엉망으로 뿌옇기만 한 시야의 정 중앙에 있던 그 말갛고 흐린 화상. 그 날부터였다. 미와 타이시가 하루에 한 번은 카이 토시키를 신경 쓰게 된 것이. 동정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감각이 통로처럼 길게 뻗어서, 그래서 지금까지 왔다.
기억났다. 이 모든 흐름의 맨 처음에 있던 비구름. 정작 지금에는 그런 감각은 아니었다. 그렇게 쉽게 흐르고 통하는 감각이 아니었다. 아마 내가 숨겨서이겠지. 잠결에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카이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그런 확신이 들고, 그리고 겨우 눈물이 시야에서 걷히고, 얼굴이 보였다. 뿌옇지도 흐리지도 않은 시야에 아주 짧게 딱 한번 비치는 얼굴. 동시에 잠에서 깼다. 자기도 모르게 울고 있던 모양인지, 뺨이 축축했다. 머리맡에 놓아 둔 휴대폰이 길게 진동했다. 뒤집어 보자, 화면 가득 메일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메일’들’이었다. 자는 동안 미처 읽지 못한 메일이 조르륵 딸려 올라왔다.
[미와]
[미와 상태는]
[곧 가지]
붙임성이라곤 없는 짤막한 단문과 지난 날의 기억이 어지럽게 뒤섞여서 코 끝이 매웠다. 콧대 쪽이 아릿하게 아프다. 심호흡을 한다. 이런 건 보이기 싫다. 감기건, 지난 날의 서글픈 기억이건 뭐가 되었건 곧고 강하게 선, 적어도 그러기로 마음 먹은 사람 앞에서는 내비치기 싫은 모습. 다시금 밀려드는 소독약 냄새가 도움이 되었다. 어둡게 저물기 시작한 창가에 반사되는 모습은 조금 낯설었다. 손을 뻗어 커튼을 쳤다. 카이가 걸어 들어 왔을 때. 적어도 그 모습을 창가에서까지 좇지 않도록. 대신 눈을 감았다. 공기 중 습기가 심술을 부리듯 피부를 스친다. 싫은 날씨가 계속 될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