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카이] AU 무제 (10)
한창 아침을 짓던 미와는 발목 언저리가 휑한 기분에 아래를 내려다 보았다. 평소라면 귀찮을 정도로 와글와글 미와 근처에 모여 있었을 아기 용들이 한 마리도 없었다. 설마, 하는 생각에 침실로 향하자 빠꼼 열린 채인 문이 보였다. 앗차 싶었다. 막 날갯짓을 제대로 익혀서 문고리까지 올라갈 수 있는 녀석이 있다는 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한창 소리 내기와 뜀뛰기에 푹 빠진 어린 개체들이 카이를 깨우지 않고 그냥 두었을 리가 없었다. 살짝 문을 밀어 열자 맨 먼저 보인 것은 카이였다. 침대를 덥히려고 올려 두었던 어린 용은 여전히 품에 폭 안긴 채, 다른 용들이 꺅꺅거리고 폴짝이는 것을 가만 보고 있었다. 조그마한 털모자에 달린 방울이 한 시도 쉴 새 없이 위아래로 흔들거리고, 어린 것들이 앙알거리는 소리가 아침 새 지저귀는 소리처럼 방 안을 채웠다.
그 때였다. 카이가 살짝 웃었다.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씁쓸하고 희미하게 웃는 모습만 보아도 마음이 덜컹 흔들렸을텐데. 심장이 거꾸로 뒤집히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눈꼬리가 살며시 휘어지고, 아침 햇살로 투명하게 밝은 방 안이 새삼 하얗게 보였다. 미와는 그 때에 새삼 생각했다. 자신은 정말로 반한 것이 맞았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기분이 들고, 손아귀에서 모래처럼 사락 빠져나갈까 더럭 겁이 일었다. 어제 잠시나마 품었던 희망은 그 잔향이 끈질겼다. 혹여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카이 안에 자신이 희망하는 것과 닮은 감정이 있더라면. 그래주기만 한다면 미와는 빌어서라도 카이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고 싶었다. 알고는 있다. 종전이 무사히 오기만 한다면 카이에게 돌려질 영예는 곧 훌륭한 자택과 높은 직위일 것이었다. 왕국군 내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훈장이 내려질 것이었고, 카이 산하에 들 기사단이 한 두개가 아니게 될 것이었다. 자신은 그런 카이에게 차마 농으로라도 말 할 수가 없었다. 카이가 이런 산 언저리에 살아 무엇이 즐겁고 좋겠는가. 수도에만 가도 온갖 향락과 편의시설이 넘쳐 났고, 모든 수발을 들어 줄 하인들도 응당 내려질 상 중 하나일 터였다. 카이는 더 좋고 편한 것들을 받아 마땅했다. 기나긴 전쟁을 급격하게 단축시키고 승리를 가져 온 그에겐 종전 후의 휴식 또한 최고급이어야만 마땅했다. 미와가 제공할 수 없을 것들을 받아야만 했다. 편히 쉬고, 좋은 대접을 받고, 그리고 어느 높은 분의 아름다운 영애와 결혼이라도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게 역시 가장 좋겠지. 미와는 그런 쓴 생각을 하며 한숨을 삼켰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것. 그는 아마 같은 눈으로 미와를 보고 있지 않을 것이었다. 잔인한 일이었다. 얼만큼 반했는지 막 깨닫고 나서 해일처럼 밀려오는 것이 현실적인 단념과 걱정 뿐이라니. 그 모든 것을 능숙하게 숨기고는 가벼운 미소를 둘렀다. 이런 일도 앞으로 곧 그리워질 것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아침 준비 다 됐어."
아무렇지 않다고 되뇌어 생각하는데도 목소리 끄트머리가 살짝 흔들렸다. 다행히 눈치채지 못한 듯, 카이가 웃음기가 남은 얼굴로 돌아보는 것이 보였다. 뒤집혔던 심장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은 꽤 아픈 일이었다. 익숙해져야만 하는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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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는 기분이 퍽 좋은 듯 했다. 다행히도 잘 쉰 모양인지 눈가가 밝았고 기운이 있어 보였다. 아침밥 또한 남기는 일 없이 먹어 치웠고, 달콤한 차를 물리지도 않았다. 미와는 뭐라 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마음 속이 달았다가 눈이 찌푸려지게 시었다가 했다. 기분 좋을 때에는 이런 표정을 하는구나. 무표정 너머로 미세한 차이가 보이기 시작하고, 찻잔을 감아 쥐는 흰 손가락에 남은 굳은살이 하나하나 위치를 욀 정도로 눈에 익었다.
한 번 제 나이 또래로 보이고 나서는 줄곧 그렇게만 보였다. 차가 너무 단 모양인지, 살짝 미간을 찡그리면서도 불평하는 일 없이 잔을 비우는 모습이 또 사람을 흔들었다. 식사 중의 시답잖은 대화. 대충 듣는 일 없이 진지하게 똑바로 보아 오는 눈을 마주칠 때마다 들킬까 싶어 겁이 났다. 차를 따른 이후에 부드럽게 깔린 침묵을 카이가 처음으로 깼다.
"곧 끝날 것이다."
굳이 주어를 붙이지 않아도 알았다. 카이는 지금 전쟁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부드럽게 풀려 있던 눈매에 다시금 날카롭게 벼린 빛이 서렸다. 그것조차 지독하게 보기 좋았다. 그래서 미와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맞다. 곧 끝날 것이었다. 전쟁도. 이 얄팍하고 사랑스러운 놀음도.
"한 번의 전투만이 남았다. 그 국경을 찬탈하면, 명실상부한 왕국군의 승리가 되겠지."
미와 또한 알고 있었다. 왕국군의 군세는 이미 하늘까지 닿았다 할 정도로 쟁쟁했다. 연이은 패배로 지치고 수가 준 적군은 쉽게 왕국군을 이기지 못할 것이었다. 마지막 독기를 퍼붓는다 해도, 적어도 세 개의 용기사단이 출전하는 전투에서 역전을 바라는 것엔 운 이상이 필요했다. 미와는 살짝 웃어 보였다. 다행이다. 그가 원하던 전쟁의 끝이 이렇게나 가까웠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그는 아마 줄곧 행복할 것이었다. 미와가 닿지 못할 곳에서 계속 행복했으면 했다. 다시는 군용의 보급이 필요하지 않은 삶을 살았으면 했다.
"...그래."
다행이다.
그 말만은 정말로,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말할 수가 있었다. 다행이었다. 그가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 남아서. 전쟁을 헤치고도 잃은 곳 없이 무사해서. 그리고 그 이후로는 그저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있어서. 그 말을 하는 순간만큼은 떼를 쓰고 일 없이 서러워하던 목소리들이 뚝 멎었다. 다행이었다. 이렇게나마 그를 만났어서. 오늘 이후로는 볼 일 없을 사람이지만, 그래서 더 다행이었다. 이렇게 한 번 더 보러 와 주어서 다행이었고, 볼 일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미와는 진심으로 웃어보일 수 있었다. 속으로 몰래 비는 소원 또한 비길 데 없는 진심이었다. 행복하기를. 무사하기를. 카이가 따라서 미소 지었다.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겠지, 하는 생각이 꼬리를 길게 끌었다. 맑고 밝은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