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카이] AU 무제 (4)
카이는 눈을 떴다.
늘 그랬듯 해도 채 밝지 않은 새벽 시간. 일찍 눈을 뜨는 것은 비단 장수만의 미덕이 아니었다. 다만 보병들이 출전을 준비하는 쇳소리나 예민한 군마들의 발 구르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얄팍한 가죽 천막 아래로 올라오는 쭈뼛한 한기 또한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등을 훈훈하게 덥히는 온기. 유리창을 톡톡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며 내는 탁탁 튀는 소리. 어린 용들이 잠투정을 하며 가르릉거리는 자그마한 소리. 습기차고 써늘한 전쟁터의 새벽 내음 대신 달콤한 차 향기가, 아침 짓는 냄새가 풍겼다. 얼떨떨했다.
“일어났어?”
그을음이 묻고 조그마한 송곳니에 찢긴 자국이 가장자리에 가득한 분홍색 앞치마가 시야를 가득 메웠다. 고개를 올리자 용의 알을 옆구리에 하나씩 끼고 얼르는 미와가 보였다. 그제야 상황이 파악이 되었다. 지난 밤, 카이는 미와를 도와 일을 했다. 견습 기사단원 시절을 제외하면 기사다운 일, 즉 전투만을 해 온 카이에게는 영 어색한 일들 뿐이기는 했다. 작은 아궁불을 지펴서 어린 용들의 품에 넣어 주고, 조금 더 자란 개체들에게는 거칠고 물에 젖지 않는 가죽 담요를 잠자리에 깔아 한기를 막았다.
미와가 안겨 주었던 알은 그저 일을 시키려는 핑계가 아니었다. 어디다가 내려 두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하는 카이를 본 미와는 웃으며 말했었다. 당신이 탈 드래곤이라고. 당장이라도 출전해야 하는 상태를 생각하면 울분이 치솟았지만, 현재 미와 수중의 유일한 파이어 드래곤의 개체는 그 알 뿐이라는 말을 듣자 맥이 탁 풀렸다. 조금은 씁쓸한 것도 사실이었다. 보통 한 브리더가 수중에 두는 개체는 속성당 기본 세 마리에서 다섯 마리였다. 속성당 발란스를 맞추어 브리딩을 하는 것 또한 브리더의 일이었으므로. 이만큼 불균형이 온 것은 아마 카이의 탓이 맞을 것이었다. 하루 정도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의 속죄는 함이 용기사로써 브리더에게 경의를 표하는 길이라고도 생각했다. 따스하게 온도가 고정된 부화실 한 편에 카이에게 건네었던 알을 넣어 두고, 그 곁에 이부자리를 깔아 주는 미와에게 마냥 화를 내는 것이 영 쉽지만은 않았다.
미와는 단순히 성룡만을 기계적으로 길러 내는 브리더가 아니었다. 그 정도의 안정감이 있는 성룡을 길러 내는 데에는 당연히 댓가가 필요했다. 맹목적인 애정. 보살핌. 단순히 속성 만으로 개체를 분별하는 것이 아니라, 개개의 성질과 유전적 형질에도 신경을 기울였다. 나잇대로 용들을 구분하고 각 그룹마다 필요로 하는 케어를 쏟았다. 말 그 대로 하루가 모자랐다. 카이는 조금 숙연한 기분이 들었다. 보였기 때문이다. 미와가 근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생명을 향한 경외감, 그리고 그 한없는 존중. 아무리 자신이 남을 죽이는 것을 업으로 삼은 이라고는 해도, 그런 사람을 대하자 일종의 존경심이 솟아 나왔다. 일종의 신성하기까지 한 깊고 따스한, 그리고 순수한 애정. 마주하기엔 조금 힘이 들었다.
그렇게 카이는 아직 채 알 껍질을 깨지도 못한, 무기물에 한없이 가까운 알들에게 둘러쌓여 눈을 감았다. 새카만 밤, 그것들이 무기물 같은 게 아니라는 것은 곧 생생히 느낄 수가 있었다. 알을 깨는 날이 머지 않은 듯 자꾸만 톡톡하는 소리를 내는 알. 폐부의 발달이 끝난 모양인지 숨을 쉬는 작은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카이는 복잡한 심경으로 뒤척였다. 카이가 한 번 뒤척일 때마다, 어느 것인지 모를 알이 따라서 톡톡 소리를 냈다. 이 좁은 방 안에만 해도 산 생명이 손가락으로 셀 수도 없이 가득했다. 그건 카이에게는 조금 괴로운 일이기도 했다.
잠들기 직전까지 느꼈던 정의하기 힘든 착잡한 괴로움이 다시금 카이를 뒤덮으려고 하고, 미와는 그런 카이에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아침 먹어. 알 데리고 나오고. 카이는 묵묵히 따르는 자신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그 이상의 토는 달지 않았다.
양 팔에 묵직한 알을 하나씩 끼고 어르던 미와가 어제와는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조금 숨이 답답했다. 부화실을 나서기가 무섭게 발치에 옹기종기 모이는 작은 것들. 부화실 안에 들어가는 것은 금지된 모양인지, 문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미와를 기다리던 아가용들이 일제히 기쁜 소리를 내며 미와의 뒤를 아장아장 쫓는 것을 보며, 카이는 처음으로 조금 웃었다. 답답했다. 조금은 괴로웠다. 그럼에도 싫지는 못했다. 그런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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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는 미와의 생각과는 다르게, 아주 순순했다. 당장이라도 안겨 준 알을 내동댕이 치고 목에 칼날을 겨누어도 이상하지 않을 소문을 몰고 다니는 사람. 오히려 카이가 이럴수록 미와는 씁쓸해졌다. 고작 딱 한 밤. 하룻밤만인데도 카이의 얼굴은 벌써 꽤나 풀어져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채 써늘하게 가라앉았던 눈가에 온기가 돌았다. 보고 있을 수록 증명할 뿐이었다. 그는 결코 잔인하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전쟁을 끝내고 싶어하는 가여운 청년일 뿐이었다.
미와는 그릇 가득 수프를 떠서 그의 앞에 내려 놓았다. 목이 타도록 달콤하고 진한 차를 타고, 비 오는 아침에 어울리는 희고 따끈한 빵을 구워 잘랐다. 짤막한 감사 인사와 함께 식사를 하는 모습에서 숨길 수 없는 기사 태가 났다. 조용하고 빠르게. 언제든 적이 습격하더라도 반격할 수 있도록 한 쪽 손은 칼집에. 그럼에도 무릎에는 얌전히 알을 올려 둔 상태였다. 미와는 쓰게 웃었다. 그린 것처럼 반듯하게 고운 사람. 그리고 딱 그만큼 가엾은 사람. 그는 종전을 바랐다. 전쟁이 끝난다면, 그는 줄곧 이런 모습으로 평온하게 지낼 수가 있을 것이었다. 미와는 생각을 바꾸었다.
이제, 미와 또한 종전을 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