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헤이덴] 여름부터 여름까지 (3)
결국 헤이다유는 수업이 전부 끝나고 석양이 드리울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빈 캔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들큰하고 텁텁한 액체가 지난 자리에 의뭉스러운 문장이 하나 남았다.
그 애는, 어떤 식으로 저를 '선도'하려 들까.
그런 생각을 하며 가방을 싸던 헤이다유는 휴지통을 겨냥하고 빈 캔을 던졌다. 위태로운 포물선의 모양에도 불구하고 캔은 휴지통 안에 무사히
안착했다. 산지로가 어깨를 가볍게 치고 지나갔다. 헤이다유는 조금 웃었다.
덴시치는 온종일 말이 없었다. 무슨 일인지 전해 들은 사키치는 난처한 미소와 함께, 힘들면 언제든 그만두는 편이 옳다는 말을 남기고 회계위원회 모임에
가 버렸다. 평소라면 덴시치도 예법 동아리의 부실에 들르거나 했겠지만, 오늘은 썩 내키지 않았다. 그 이유는 스스로도 잘 알았다.
 ̄헤이다유하고 마주칠까봐서.
덴시치는 그런 제가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헤이다유를 마주하는 것이 무섭다거나 열없다거나 하는 게 아니었다.
신발코에 채이는 자그만 돌멩이를 툭 차며 덴시치는 생각했다. 그런 게 아니었다.
......어색한 것이다.
돌멩이는 곧 차도로 날쌔게 도망쳐 버렸다. 덴시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이고는 걸음을 재촉했다. 복습할 양이 많았다.
헤이다유와 덴시치는 같은 예법 동아리 회원이었다.
1학년일 적부터 그랬다. 말이 예법 동아리지, 인문학에 가까운 고전 예법부터 다도까지 취급하는 잡식성 동아리인데다가 대외적 활동이라곤 요만큼도
없는, 게으르기까지 한 동아리였지만 덴시치는 그 동아리를 퍽 좋아했다. 조용하고 말간 햇살이 꽉 차오르는 창가. 건조한 나무바닥 위에 단정히 앉아
말차 따위를 홀짝거리다 보면, 학업 스트레스나 대학 입시같은 무미건조한 단어에까지 촉촉한 차 향이 배는 것 같았다.
헤이다유는 좀 다른 의미로 동아리 활동을 즐겼다.
이전 회장이었던 센조의 배려로, 동아리실 한 구석에 다도용 기모노를 갈아입기 위해 마련된 간이 탈의실을 암실로 바꿔 쓸 수 있도록 해 준 것이다.
과학실 창고에서 낡은 검은색 커튼을 몰래 가져 와 탈의용 커튼 대신 바꿔 달고 백열등 대신 전용 램프를 들여 놓은, 작고 고요한 암실.
헤이다유는 아직도 또렷히 기억했다. 그 작은 암실이 생기기 전, 센조가 건넸던 말들을.
'1학년. 너 사진 대회에서 금상 받는 애라며?'
살짝 외로 기울여 자신을 위아래로 훑는 시선. 뭐라 생각하기도 전에 불퉁한 말이 먼저 나갔다.
'그런데요.'
센조는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건방진 1학년을 앞에 두고, 웃으며 말했을 뿐이었다.
'그럼 내 졸업날에 사진 좀 찍어 줘.'
대신, 암실 만들어 줄게.
어딘가 유쾌한 구석이 있는 미소. 짓궂다고 해도 좋을 정도의 행동. 차분하고 고요한 겉모습 뒤에 흐르고 있던 밝은 강 같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곁에 조용히 앉아 차를 따르던 다른 1학년. 헤이다유는 손을 괜히 쥐었다 폈다. 온종일 캔을 움키고 있던 손 안이 영 허전했다.
헤이다유는 센조가 졸업한 이후에도 곧잘 동아리에 모습을 비췄다. 매번 인화만 쏠랑 하고 돌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가끔 차를 얻어 마시거나,
멀뚱히 서서 다른 사람들 하는 양을 구경하거나, 부원 몇과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인 동아리 경영이나 실무를
돕는 건 아니긴 했다. 그럼에도 덴시치는 그런 헤이다유가 딱히 밉살스럽다거나 하진 않았다. 원체 일이 없는 동아리이기도 했거니와, 무엇보다 헤이다유는
이 부실 한 구석에 작은 공헌을 해 둔 바 있는 것이다. 온갖 잡다한 책이 빼곡히 꽂힌 책장 옆, 벽 귀퉁이에 붙어 있는 손바닥만한 사진 한 장이 그랬다.
센조 선배의 졸업식 날.
쪼르륵 모여 선 몇 없던 부원들과 그 가운데 서서 조용히 미소 짓고 있는 센조 선배.
오후면 따끈한 노랑 빛이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차는 부실. 그 메마른 먼지 냄새가 당장이라도 후각을 찡하게 할 것 같은 그런 사진이었다.
그 사진을 찍던 헤이다유의 얼굴 표정은 이제 기억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일은 헤이다유의 이름자를 또렷하게 기억시키기엔 충분했다.
사사야마 헤이다유.
그 이름을 생각하며 멍하니 섰던 덴시치는 횡단보도의 불이 바뀐 것을 뒤늦게 알아 차리곤 걸음을 재촉했다. 초록불이 급하게 껌벅였다.
동시에 머릿속에 흰 이름이 깜박였다. 무슨 한자를 쓰더라. 그런 생각이 깜빡깜빡, 횡단보도의 흰 줄을 따라 굴렀다.
콘크리트 바닥에 세피아 색으로 길다랗게 늘어지는 그림자를 보며 걷던 헤이다유는 생각 없이 앞을 보았다가 화들짝 놀라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곤
운동화 바닥으로 짓이겼다. 저만치 앞에 걷는 흰 셔츠 등이 묘하게 낯익었다.
곁에 선생님이 가더라도 담뱃불 끈 적 없는데. 헤이다유는 속으로 작게 투덜거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기왕 담배까지 끈 거, 뭐라고 말이라도 붙여볼까 하는
마음이 부풀어올랐다. 헤이다유는 괜히 숨을 크게 머금었다 뱉었다. 담배 냄새 난다고 타박이라도 들을까봐서 더럭 겁이 났다.
재게 놀린 걸음 수만큼 덴시치는 쉬이 가까워졌다. 손톱 맨 끝에서부터 팔꿈치까지 될 법한 거리. 이런 걸 지척이라고 하던가? 단어야 어떻던,
뒤에 누가 걷는 줄도 모른 채 길을 가는 덴시치를 불러 세우기란 여간 막막한 일이 아니었다. 헤이다유는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퍼뜩 웅크렸다.
하마터면, 어깨를 스칠 뻔 했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자, 대신 능청스러운 인사말이 미끈하게 흘러나왔다. 기름칠이라도 한 양, 기도를 미끈덩 빠져나오는
말. 헤이다유는 내심 놀란 채였다.
"안녕, 쿠로카도 군."
덴시치가 즉각 고개를 돌렸다. 조금 놀란 얼굴.
살짝 치뜬 눈동자 안, 홍채의 결을 따라 석양빛이 찰나 반짝였다. 눈이 부신 듯, 눈을 비비는 손. 그 손날에 볼펜이며 연필 자국이 거뭇했다.
아쉬웠다. 저런 걸 찍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덴시치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안녕.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게 하듯이 이것저것 말을 붙이려던 헤이다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벌건 주홍빛을 받아 연한 그림자가 지는 옆얼굴은 참 피곤해 보였다.
그제야 피부로 와 닿는 것 같았다. 볼펜 자국. 지쳐서 살짝 거뭇해진 눈가. 살짝 충혈된 눈.
우리 고 3이지, 참.
헤이다유를 포함하고 쇼자에몽을 제외한 하반 아이들은 하나같이 공부나 대입 시험에는 영 흥미가 없었다.
신베나 키산타처럼 가업을 잇는다거나, 단조나 토라와카처럼 체육계를 희망하거나, 그도 아니면 저처럼 무엇인가 예술 하나를 붙들고 파고 있는 학생들
일색인 것이다. 예체능과는 인연이 없는 이반과는 받는 스트레스의 종류부터가 다르겠지. 그래서 헤이다유는 그냥 조용히 걸었다. 결국 가벼운 어색함을
견디지 못한 덴시치가 먼저 말을 건넸다.
"사사야마. 네 선도, 어떻게 해?"
평소 친구들에게 하던 것 처럼, 놀리듯이 말꼬리를 늘어트리려던 헤이다유는 간신히 말을 고쳤다.
쿠로카도 군, 진지한 편이니까.
"쿠로카도 군은 어쩌고 싶은데?"
덴시치가 잠깐 걸음을 멈췄다. 헤이다유도 따라 멈췄다.
근처 피아노 학원의 창틈새로 서투른 캐논이 빠끔 고개를 내밀었다. 헤이다유는 일순 궁금해졌다. 덴시치도 지금 이 소리를 듣고 있을까.
막무가내로 힘을 주어서 건반을 누르는 소리. 자꾸만 엇나가는 높은 도 소리. 이런 것을 지금 나와 같이 서서 듣고 있는 걸까.
덴시치는 의외로 금방, 또 의외로 솔직하게 대답했다.
"모르겠어."
듬성듬성 심기운 가로수가 쏴 하는 소리와 함께 동시에 출렁였다. 머리카락이 잠깐 뺨을 간질였다. 헤이다유는 뭐라고 대답하지 않아도 좋다는
암묵의 허락을 받은 채였다. 덴시치가 시선을 내렸다. 생각하는 듯 했다. 여전히 그 하복 셔츠는 눈이 시리도록 희었다. 빳빳한 칼라에 코를 박고
한껏 숨을 들이키면 섬유 유연제 향이 풍길까 하는 실없는 생각이 들었다.
"사사야마는 왜 담배 피우는 건데?"
헤이다유는 조금 놀랐다.
질문의 내용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는 덴시치의 말끝에 경멸이나 혐오 비슷한 것의 발뒤꿈치조차 비치지 않아서였다. 으레 우수반 학생이라면,
아무리 예체능이라고 한대도 공부는 않고 노작거리며 사는 저 같은 어설픈 인간은 무조건 혐오하리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헤이다유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가볍게 미소 지으며 애매한 소리를 냈다.
"으음."
다행스럽게도 덴시치는 득달같이 대답을 끌어 낼 생각까진 없는 모양이었다.
대신 덴시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줄곧 되풀이되던 캐논은 어느새 조금 더 매끄러워져 있었다. 헤이다유는 갈림길에서 희미한 소리로 인사하고 등 돌려
걸어가는 곧은 등을 잠깐 선 채로 바라보았다. 그런 제 모양새를 비웃듯 흔들리는 나무 이파리들. 그 틈새로 얄밉게 언뜻언뜻 얼굴을 비치는 저녁놀에
눈이 부셨다. 헤이다유는 반사적으로 담배를 빼 물었다. 찰칵. 라이터를 켜는 소리는 셔터를 누르는 소리와도 닮았다. 허파 맨 밑까지 가볍고 뜨끈한
연기가 들어차길 기다렸다가 길게 내뿜었다. 잇새에 머금어지는 이 쌉쌀한 감각. 기도에 손톱을 세우는 칼칼한 박하향. 이제 모퉁이를 돌아 보이지 않는 흰 등.
'그런 걸 어떻게 말해.'
귓불에 따끈하게 열이 오르고, 동시에 좀 머쓱해졌다.
헤이다유는 애꿎은 뒤통수만 벅벅 긁고는 발걸음을 떼었다. 그 걸음이 지난 자리에 회백색 담뱃재가, 반투명한 연기가 잠깐씩 머물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늘이 완전히 보랏빛으로 저물었다. 헤이다유는 그 빛깔의 테두리를 보다가 훅, 연기를 뿜었다. 청보랏빛 연기가 위태하게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