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헤이덴] 푸른 봄 2
언젠가부터 새벽을 지새우는 날은 꽃이나 꽃
가지를 꺾어다 방에 둔다.
손 끝에 남은 나무조각을 바라보던 헤이다유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스스로도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쓴 웃음이 절로 걸렸다. 이틀 정도 임무를 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핀 모란이 못내 눈에 밟혀서 결국 한
가지 꺾어 돌아왔다. 헤이다유는 아직 곤히 자는 덴시치의 머리맡에 조용조용 모란 가지를 내려놓고 돌아섰다.
베개가 축축히 젖어 있는 것이 묘한 감각을 불러일으켰다. 방 너머까지 모란 향기가
그윽하게 울렸다. 그 진한 향내는 곧 깊게 잠겨있던 기억들을 끄집어내서 풀어놓았다. 작업실로 가는 내내 헤이다유는 그 몽롱함에 취해 말이 없었다.
2학년이 되고 한 달이나 지났을까
하는 때였다. 헤이다유는 한창 기계장치 생각 밖에 없었고, 말수가 적은
새 위원장은 도통 자리에 붙어 있지를 않았다. 위원회 모임이 있는 날이면 덴시치와 토나이는 둘이서 아야베를
찾으러 가곤 했고, 헤이다유는 위원회실 한 구석에서 조용히 도면을 그리거나 신입생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했다.
그 날은 모임이 유달리 늦어져서, 신입생들은 결국 기다리다가 지쳐 돌아가고 헤이다유는 혼자 위원회실에 남아
새로 구상하던 장치들의 도면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끔 아야베는 찾을 수도 없게 훌쩍 멀리 나가 버렸기 때문에,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장지문 너머로 아득하게 토나이의 목소리가 들리고,
해가 뉘엿거렸다. 도면을 정리하던 손길이 주춤 멎었다. 기억에 없는 서툰 도면이 몇 장 정도 끼어 있었다. 딱히 구상도 기계적인 부분도 뛰어나지 않은
그런 진부한 도면들이었다. 깔끔하고 작은 글씨가 눈에 익었다. 가만히
도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장지문이 드르륵 열렸다. 덴시치가 문가에 선 채로 말했다. 피곤에 찌든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낮게 방 안을 채웠다.
“사사야마. 아야베 선배를 도저히 못 찾겠으니까 오늘은 그만 돌아가.”
어쩐지 울컥하고 분기가 일었다. 대체 저 말의 어디가 속을 거슬렸느냐고 하면 그게 또 확실치 않았다.
알고 지낸 지 1년이 지나고서도 고집스럽게 성으로 부르는 부분이? 아니면 별 감정 없이 건조한 문장이? 헤이다유는 그런 걸 자세히 신경 쓸 정도로 성숙하지 못했었다.
속에서 심술이 슬슬 치고 올라왔다. 입술 사이로 나온 말은 바닥에 드리운 노을처럼
시뻘갰다.
“이거……. 네 거야?”
석양이 방 안에 꽉 들어찬 와중에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덴시치의 뺨이 붉어졌다.
헤이다유는 그 순간이 소름 끼치게 좋았다. 그 뭐라 말 할 수 없는, 덴시치의
감정이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되는 순간이 발갛게 물든 뺨과 함께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강렬하고도 야릇한 감각이었다.
가느다란 입술이 뭐라 말하기 위해 열린 순간, 헤이다유는 벌떡 일어났다.
덴시치의 시선이 따끔하게 와 박혔다. 그 앞에 선 헤이다유는 도면을 내밀었다.
덴시치의 표정이 싸하게 굳어있었다.
“돌려줄게.”
가는 손가락은 순순히 도면을 받아 들었다. 말 한마디 없이 뒤돌아 걷는 등 뒤가 왠지 얄미웠다. 헤이다유는 그 등 뒤에 결국 한 마디를 더 하고야 말았다.
“─그런 거, 못 만들어. 설계를 할 거면 제대로
하던가.”
묵묵히 걷던 등이 멈췄다. 석양빛을 받아 빨갛게 빛나는 머리카락이 찰랑거리며 흔들렸다.
돌아 본 눈가에 반들하게 어린 눈물이 똑똑히 보였다. 흰 손가락은 건네 받은 도면이
구겨지도록 쥐고 있었다. 평소라면 듣지도 못 할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덴시치가 속삭였다.
“너, 진짜 싫어.”
다시 등을 돌려 뛰어가는 덴시치의 올려 묶은
머리카락이 움직임에 맞춰 흔들렸다. 그 단정한 끝은
흔들릴 적 마다 헤이다유의 머릿속에 얼얼한 파동을 일으켰다. 정신을 도로 붙잡았을 때엔 이미 덴시치도,
노을도 모퉁이를 돌아 가 버리고 없었다. 그 서툰 도면들은 몇 번이나 고쳤는지 하나같이
손때가 묻어 누덕누덕했었다. 초승달 모서리가 가슴 한 구석을 날카롭게 후벼 파며 떠올랐다.
덴시치에 관련된 기억들은 하나같이 그랬다. 어딘가 서툴고, 성숙하지 못하고,
잔인하고 또 동시에 강렬한 듯 아름다웠다. 참으로 확실하고도 복잡한 감정이라고 헤이다유는
생각했다. 작업실에 들어 선 헤이다유는 자동적으로 서랍 안을 뒤졌다. 한참을 그러고 있는데, 손에 잡히는 낡은 종이의 감촉이 익숙하다. 딱 한 장, 돌려주지 않은 도면이 손 끝에 딸려 나왔다. 고치다 못 해 분에 못 이겨 흘린 눈물 자국이 종이 위에 선명했다. 작고 깔끔한 글씨도,
어딘가 미숙한 설계도도, 자신은 그저 소유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지금 자신은 만족해야 하는 게 아닌가?
헤이다유는 한참을 그 도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한 글자 글자에 스며든 아릿한 향기가 가슴
속에 둘러진 사슬에 가시를 달았다. 그 아픔마저도 고와서, 헤이다유는
허 하고 웃었다.
덴시치는 강렬한 향기에 잠을 깼다.
잠결에 머리맡을 더듬자, 꽃 가지가 하나 손에 쥐여진다. 문득
먼 옛날의 기억이 났다. 8년도 더 전, 헤이다유에게 싫은 소리를 듣고
훌쩍거리며 복도를 뛰어가던 2학년 때의 어느 날에도 창 밖에 모란이 보였었다. 막 꽃을 피우려는 꽃봉오리가 너무 보드랍고 예뻐 보여서, 한참 바라보던 덴시치는 어느 새 분한
눈물도, 서러운 마음도 전부 잊었다. 그 날 이후로도 곧잘 그 창가에
서서 같은 꽃나무를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부드럽게 스쳤다. 그렇게 창가에 서 있곤 하면 목덜미가 따끔거리곤
했지만, 덴시치는 졸업하는 그 날까지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이가 안 좋던 아이들도 학년이 올라가고
나이가 들음에 따라 살갑게 지내곤 하는 게 보통이다. 그건 이반과 하반 사이에도 예외는 아니었고, 2학년까지만 해도 변함 없이 옥신각신하던 것도
3학년이 되면서 없던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이다유와 덴시치 사이는 변함
없이 냉랭했다. 주위에서도 눈치를 채고, 둘이서만 있는 자리를 만들지
않는 게 암묵적인 예의가 되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상냥한 어조로 넌지시 묻는 아이들도 있었다.
너, 걔랑 싸웠어? 라든지, 너, 그 애랑 사이 안 좋더라. 하는 식의 말이 던져질
적이면, 헤이다유는 멋쩍어졌다. 어색한 침묵을 잠깐 두고 그런 거 아니야.
라는 대답을 한 게 학기 중에도 몇 번이나 되었다.
그 난리에도 덴시치는 새침하게 고개를 외로
돌리고는 별로. 하고 말았을 뿐이었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건네 들은 말 만으로도 헤이다유는 그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그러고 보면 그 말을 해 준 것은 란타로였다. 란타로는 보건위원이라 그런지 유독
아이들 사이 관계에 민감하고 또 잘 챙기는 편이었고, 그 범주에 헤이다유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동시에, 란타로는 헤이다유의 속내를 뜨끔하게 만든 유일한 인물이기도 했다.
그 이야기를 해 주면서 란타로가 말했었다. 그러지 마, 헤이다유.
자신은 그저 다시 멋쩍은 얼굴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러는 거 아니래도.
그 때의 란타로의 진지하고 앳된 얼굴이, 고집스레 뒤를 돌아보지 않던 흰 목덜미가 아렴풋이 떠올랐다.
각막 안에 흐르는 영상이 그립고도 멀었다. 당장 몇 걸음만 가면 덴시치가 있다는
걸 앎에도, 가슴은 딱 그 만큼 멀게 느껴졌다. 몇 년이나 지나도 자신은
그 때 그대로 어린 것 같았다. 얇은 벽 너머로 배어드는 희미한 울음소리가, 괜히 쥐었다 펴는 손 안이 섬찟하게 허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