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리도이] 당신의 어리광 上
와 드디어 썼다!! 당신의~시리즈 10제 중 하나인 리도이입니다
리키치킁 성격잡기 힘드네요 그렇지만 그런 리키치가 싫지 않아요 우후훗
+) '반하는 순간'에 집중하는 글이 좋아요......평범한 변태지만 개의치 않으려구요
“안녕하세요, 리키치 씨.”
오랜만에 인술학원을 찾은 얼굴엔 미미한 붉은 빛이 돌았다.
코마츠다는 고개를 갸웃, 하면서도 으레 그러듯 입문표를 내밀었다. 겨우 찾은 봄을 시기하듯 불쑥 들이닥친 꽃샘추위에 뺨이 언 것이리라 하는 생각을 하던 코마츠다는 조금 더 의아해졌다.
“사인, 안 하세요?”
평소라면 따로 물을 이유도 없이 빠르게 사인을 해서 건네곤 하던 입문표는 아직도 리키치의 손에 들린 채였다. 리키치는 잠깐 더 머뭇대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안에 계시나 해서.”
야마다 선생님을 말하는 것이리라고 생각한 코마츠다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리키치는 곧잘 학원에 들러서 아버지의 세탁물을 가지고 가거나, 뭔가 상담하거나, 어머니의 안부를 전하곤 했기에 딱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그 이전에 아들이 아버지를 찾는다는 데 누가 흰 눈을 뜨고 보랴 싶은 생각이 들었다. 코마츠다는 두 사람의 부자관계가 퍽 귀엽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야마다 선생님은 오늘 1학년 하반의 야외실습 때문에 안 계세요. 아마 저녁식사 즈음에 돌아오실 거에요.”
이번엔 리키치가 고개를 저었다.
코마츠다는 멍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리키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제법 의외였기 때문이다.
“아니, 아버지 말고, 도이 선생님은 계십니까.”
“…...계세요. 사무실에 계실 거에요.”
리키치는 대답을 듣기가 무섭게 사인을 했다. 입문표에 그어지는 먹 자국이 번짐과 동시에 코마츠다의 궁금증도 번졌다. 빠르게 걷는 리키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코마츠다는 흰 입김을 훅 내뿜었다. 잠시 궁금해하던 것도 잠시,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에 코마츠다는 불에 덴 듯 후다닥 자리를 떴다. 이제 코마츠다의 머릿속엔 수업이 끝나기 전에 교장 선생님께 건네야 했던 서류 생각만 가득했다.
점점 사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리키치의 걸음이 천천히 느려졌다.
꽉 쥔 주먹의 뼈마디가 새하얗게 질린 것은 꽃샘추위 때문이 아니라 긴장 때문이었다. 리키치는 스스로도 참 꼴 사납다고 생각하면서도, 걸음을 도로 빨리 하진 못했다. 긴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주먹을 펴자 찬 바람이 식은땀을 날쌔게 채어갔다. 별 의미 없이 크게 내뱉은 숨이 하얗게 얼었다가 도로 흩어졌다. 리키치는 얼얼한 주먹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그러는 사이에 도이 선생의 사무실은 코 앞에 불쑥 다가왔다. 리키치는 괴물이라도 맞닥뜨린 양 놀란 숨을 들이켰다. 손바닥이 다시 축축하게 젖었다. 리키치는 그 앞에 우뚝 선 채로 멎었다. 손잡이에 닿는 손 끝 너머로 먼 기억이 흘러 들어왔다.
리키치가 도이를 맨 처음 만난 것은 몇 년도 더 전의 일이었다.
인술학원의 교사가 된 아버지와, 그 아래에서 교생 실습을 하던 도이 선생은 같은 사무실을 썼다. 아버지가 몇 번인가 지나가듯 말하는 말로, 실력이 좋더라는 걸 들은 게 다인 채로 만난 도이 선생은 예상 외로 차분하고 순해 보였다. 아직 앳된 기가 남은 얼굴의 청년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던 게 처음 만난 기억이다. 그 이후로는 몇 번인가, 아버지를 보러 가거나 심부름을 하러 갈 때에 맞닥뜨린 것이 다였다. 솔직히 말해서, 리키치는 도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저 참 좋은 선생이더라 하는 평을 들은 것이 전부였고, 무엇보다 리키치는 바빴다. 프로 닌자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고 일감은 속수무책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리키치는 곧 도이에 대해 잊어버렸다.
리키치가 제대로 도이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약 1년 전이었다.
드물게 아버지는 학원 일로 바깥까지 나가곤 했는데, 마침 그 날은 1학년 꼬마 두엇을 데리고 사회견학을 할 장소를 미리 봐 두어야 하는 날이기도 했다. 저 대신 다녀와 달라는 아버지에게 리키치는 흔쾌히 그러마 했다. 딱히 일도 없었거니와, 곤란한 얼굴로 부탁하는 아버지를 내치는 것도 마음이 불편했기 때문이다.
도이 선생이 같이 갈 테니, 큰 걱정 말라는 이야기를 들을 적만 해도 리키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그럼 저는 왜 가야 하느냐는 질문에, 아버지는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 근처에 요즘 사람을 마구잡이로 베는 산적 서넛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린 애가 둘이나 있어서야 도이 선생도 고전하지 않겠느냐, 즉 그것이 저에게 부탁을 하는 참 내용이라는 것이었다. 리키치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걱정할 이유도 없이 쉽겠거니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하루를 채 넘기지 못했다.
리키치는 사회견학학습을 위해 고른 장소를 몇 돌아보고, 같이 있는 아이 둘에게 길을 익히게 하는 도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온종일 길이며 상점이며, 하다못해 관련된 인술까지 하나하나 차분하게 일러주는 모양새가 퍽 선생다웠다. 몇 년 전만 해도 교생 특유의 앳된 기가 얼굴에 묻어 있었는데, 어느 샌가 도이는 어엿한 교육자가 되어 있었다. 리키치는 그 모습에 내심 놀랐다. 그 옆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학원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자니 어둑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언덕을 넘을 때가 되자, 사내 여럿이 길을 막아 선 게 보였다. 갈 적에는 토끼새끼 한 마리 비치질 않더니, 아무래도 날이 어두워지고서야 다니는 산적인 듯 했다. 대충 뭐라고 위협을 지껄이는 산적을 보던 리키치는 가만히 손가락을 검 집에 올렸다. 선뜩한 감각이 손가락을 달리는 것이 짜릿하기까지 했다. 리키치에게서 슬슬 풍기는 살기를 보던 도이는 아이들을 조용히 근처 바위 뒤로 숨겼다. 그 낌새를 눈치챈 리키치는 순식간에 검을 뽑고, 맨 앞에 선 자의 다리를 걷어 찼다. 도이 또한 금세 달려 나와서 옆에 선 자의 명치를 질렀다. 딱히 실력자로 이루어진 집단은 아닌지, 두 셋 정도가 기절한 것 만으로도 금세 뿔뿔이 도망치기 바빴다.
리키치는 검을 바로 들고 기절한 사람의 목 근처에 겨눴다. 얼굴을 본 자라면, 나중에 복수랍시고 달려들 가능성이 있었다. 의식을 잃은 지금 죽여두는 것이 후환이 없다는 판단 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치려는데, 도이가 팔을 콱 잡았다.
리키치는 놀라서 도이를 돌아보았다. 인술을 가르칠 정도로 훤히 아는 자라면, 지금 제가 왜 이러는 지 당연히 알 터였다. 뭐라 항의하려던 목소리는 도이 선생의 눈짓에 조용히 삼켜졌다.
도이 선생이 눈짓으로 살짝 뒤를 가리켰다. 바위 너머 빠끔히 내민 고개가 둘. 도이 선생이 맡아 가르치는 아이들이었다. 겁에 질린 눈동자 두 쌍이 이쪽을 보고 있었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말간 눈동자들을 보던 리키치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아아. 그래서 나를 막았나.
“리키치 군. 그냥 돌아가자.”
저를 달래듯 바라보는 도이의 눈동자는 부드럽고도 강했다. 마치 달궈진 고운 돌을 보는 듯 했다. 리키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저 남자를 칭찬하던 아버지의 말뜻이 그제야 진정으로 와 닿는 듯 했다. 품 안에 안기며 울먹거리는 어린 애들을 가만가만 달래는 도이를 보던 리키치는 감명 비슷한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감각은 곧 기묘한 간지러움이 되어서 가슴 가장 깊은 곳에 남았다.
그 후에도 리키치는 곧잘 고민했다.
그 때, 그 장소에 아이들이 없었더라면 도이는 저를 막지 않았을까 하는 것을 되풀이해서 생각한 것이 벌써 몇 번이나 되었다. 그리고 그 때마다 매번 결론은 하나였다. 거기에 아이들이 없었더라도 도이는 저를 막았을 것이다. 그 때, 부드럽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런 눈으로 누굴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그리고 리키치는 그렇게 생각할 적 마다 가슴 밑바닥에서 꼬물대는 생소한 감각에 몸서리 쳤다. 도이 한스케는 그렇게 리키치의 머릿속 한 켠에 세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