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리도이] 당신의 어리광 下
이걸로 리도이 편도 완료.
이런 애매함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만, 보통은 욕...을 먹을 것 같다.....
일단 둘이 연애한다는 데 중점을 둡시다....i _ i 더 잘 하고 싶었지만 이 정도가 리미트인 듯.
도이가 리키치의 머릿속 한 켠에 지내기 시작했어도 리키치의 생활엔 변함이 없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가는 길이 조금 더 조심스러워지고 조금 더 설레게 된 것이 다였다. 사실, 리키치는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선 무르기 짝이 없는 사람을 프로인 제가 연모하다간 저도 그렇게 물러질 것 같았다. 리키치는 심란했다. 그렇게 계절을 하나 보냈어도, 리키치는 도이가 차지한 공간을 좁히지 못했다.
여름이 가까워오자, 아버지가 제 편에 보내는 세탁물의 양이 늘었다. 리키치는 자연스레 인술학원에 들리는 횟수가 많아졌다. 날이 더워지는데도 도이의 미소는 부드럽고 청량했다. 리키치는 가끔씩 창피한 기분이 들었다. 특히나 어머니의 전언을 전할 때면 더 그랬다. 집에 좀 들르시라는 말을 전하면, 아버지는 턱을 슬슬 문지르며 곤란한 얼굴을 했고 그러면 다음에 오가는 소리가 높아졌다. 리키치는 그러고 돌아가는 길이면 매번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런 가족사를 내보이는 것은 영 창피하지 않은가. 그런 생각이 돌아가는 길의 노을과 함께 발갛게 물들었다. 퍼렇게 익기 시작한 살구 풋내가 길에 깔리기 시작한 때였다.
그렇게 살구랑 같이 여물던 마음에 밤잠이 줄을 무렵, 리키치는 여느 때와 같이 아버지를 뵈러 갔다. 잠시 방에 가서 세탁물을 가져오겠다며 자리를 비운 아버지 탓에, 방 안엔 리키치와 도이만 남았다. 그 어색한 침묵이 불편했던 리키치는 헛기침을 하고 뭐라 말을 걸었다. 대단치 않은 말이었다. 지금 와서는 그 말씨를 토대로 기억해낼 수 없을 정도의, 그런 말 말이다. 매번 올 적마다 집안 이야기로 목소리가 높아져 죄송하다는 식의 말을 짧게 내뱉은 리키치를 보던 도이는 생긋 웃었다.
“그렇지만, 나는 리키치의 어머니가 그렇게라도 해서 말을 전하는 게 되려 좋아 보이는걸.”
예상 외의 반응이었다. 리키치는 자기가 어느 부분에 놀란 건지도 잘 모른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 웃는 입매가, 아니면 저 문장의 내용이? 생각을 채 마치기도 전에 도이가 말을 이었다. 가는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눈에 선명하게 맺혔다.
“그런 감정은 눌러 두면 상하고 곪는다고들 하잖아. 괜히 속병 앓으시는 것 보다야 이 편이 보기가 좋지.”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마치 제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머릿속 한 구석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리키치는 그 이후의 일은 딱히 기억조차 하지 못했다. 그만큼 도이의 한 마디는 강렬하게 리키치를 깨웠다.
그제서야 모든 것이 명확하고 깔끔하게 정리된 듯 했다. 아마 저는 상사병을 앓고 있었던가 보다, 하는 생각을 하던 리키치는 돌아가는 길 내내 얼굴을 들지 못했다. 혹여 누가 보았다간 감기라도 앓는 줄 알 정도로 벌개진 얼굴이 창피했다. 그렇게 여름이 시작되었다.
당장에라도 마음을 전하자고 생각하던 것은 급작스레 들어온 일 한 건에 덮여버렸다.
저 아래지방까지 내려가서 잠입을 하느라 막 시작된 여름도, 겨울까지 보내고 나니 자만심이 들기도 했다. 떨어져 있으면 마음이 쉬이 식는다더니, 저도 그런가 보다 하고 우쭐하던 것은 아버지가 보낸 서신에 스치듯 적혀 있는 도이의 이름자에 형체도 없이 녹았다. 리키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먹으로 깔끔하게 그어진 그 이름은, 마음에 닿자 물을 만난 듯 멀리 퍼졌다. 그렇게 잔잔한 그리움 속에 계절을 보내고 이른 봄이 왔다.
리키치는 잘 마무리 된 일을 보고도 흡족하다기보다는 조바심이 났다. 어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리키치는 돌아오기가 무섭게 인술학원 문턱을 밟았다.
긴장해서 딱딱하게 굳은 손끝을 억지로 재촉한 리키치는 간신히 장지문을 열었다.
드르륵 하고 문 열리는 소리가 꼭 칼날 갈리는 소리 같았다.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드는 리키치 앞엔 말간 미소가 하나 있었다.
“안녕, 리키치 군. 오랜만이야.”
“오랜만입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구겨 삼킨 리키치는 도이 앞에서 머뭇거렸다.
돌아가자마자 이 마음을 전하겠다고 결단을 내린 것이 무색했지만, 실제로 몇 달 만에 보는 도이는 시신경이 따가울 정도로 치명적이었다. 서성이는 리키치를 본 도이가 눈꼬리를 곱게 휘며 말했다.
“야마다 선생님이라면 야외학습 때문에 안 계신데.”
헛걸음 해서 안 됐다며 위로를 건네는 얼굴을 보던 리키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으드득 깨물었다.
기껏 결정을 내린 마음을 여기서 물렸다간, 평생 도이 얼굴을 볼 낯이 없었다.
리키치는 결국 입술을 뗐다.
“도이 선생님. 사실 오늘은 도이 선생님께 얘기를 드리고 싶어서 왔습니다만.”
의아해 하면서도 도이는 순순히 일어섰다. 리키치는 곧잘 학생들의 교육이나 행사를 도와주곤 했기 때문에, 딱히 개인적인 이야기가 있다고 해도 그 내용은 쉬이 짐작이 갔다.
“여기서 하기 좀 그런 이야기라면, 밖으로 나갈까?”
도이가 앞장 서서 데려간 곳은 외진 뒤뜰이었다. 청소도 대충 할 만큼 인적이 드문지, 마루에 먼지가 엷게 쌓여 있었다. 유독 밑둥이 굵고 색이 짙은 벚나무가 한 그루 있을 뿐인 조용한 장소였다. 말갛게 쏟아 들어오는 햇살이 차가운 공기를 가르고 도이를 비췄다.
도이는 가만 서서 리키치를 바라보았다. 맨 처음 만날 적엔 학원에 다닌대도 믿을 정도로 어린 애였는데, 벌써 이렇게 불쑥 커서 사내가 되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여리던 어깨며 등줄기가 단단히 여물어 리키치를 이루고 있는 모습은 도이에게 가벼운 감동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바뀌고, 사람이 자라고 하는 것에서 느끼는 감동이었다. 그럼에도 그 감각은, 가르치는 꼬마들에게서 느끼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그 감각은 리키치가 성큼 다가오자 좀 더 확실해졌다.
고생을 하느라 살짝 튀어나온 손마디나, 품에서 은은히 풍기는 체취가 완전히 자란 남자의 것이라는 게 느껴졌다. 불쑥 다가온 리키치에 도이는 몰래 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다. 시선을 조금 올리자, 몇 년간 단단하게 정제된 눈동자가 보였다. 확신과 결단을 담은 눈이었다. 도이는 그 눈에 어쩐지 조금 설렜다. 청년의 야심을 엿본 노인이 된 듯, 정인의 야망을 듣는 마을 처녀가 된 듯 새큼한 감각이 손가락 끝까지 내달았다.
하얗게 밝은 햇살이 도이가 뱉는 흰 숨결 구석구석까지 닿아 빛났다. 그 광경을 보던 리키치는 홀린 듯 입을 열었다. 한번 마음을 굳히자, 말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
문장이 되고 소리가 된 말이, 혼자 눌러 둔 연심을 담고 사뿐히 날아서 도이에게 닿았다. 동시에 도이의 동공이 크게 열렸다. 밝은 빛이 새어 들어가면서, 그 눈동자가 연한 갈색으로 빛났다. 꼭 1년 전 그 날 같았다. 아무리 시간이 바래도, 도이의 눈동자는 퇴색하지를 않았다. 리키치는 손을 들어 가만히 선 채로 굳어 있는 도이의 뺨을 쓸었다. 생각보다 따뜻하고, 또 거친 구석이 있는 뺨이었다. 리치키는 진심을 담아 밝게 웃었다. 도이의 뺨이 손 닿는 대로 발갛게 물드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리키치는 뺨을 쓸던 손을 들어 도이의 눈을 가렸다. 고개를 숙이자, 바깥 공기에 차게 식은 입술이 닿았다. 벚나무 가지에 앉은 산뻐꾸기 소리가 퍽 듣기 좋았다.
…품어 둔 마음이 상하고 곪기 전에, 이 말을 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건 비밀로 해 두자.
그 마음을 알아챈 듯, 뻐꾸기 우는 소리가 뚝 멎었다. 그렇게
리키치는 봄을, 머리맡에 영그는 꽃봉오리가 유독 달콤한 그런 봄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