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센이사] Before Valentine's day (中)
나의 센조는 달콤할줄 모른다 하시는 분들 주의해주세요.
또, 발렌타인데이 8일 남았는데 염장질따위 전혀 보고싶지 않으신 분들도...주의...ㅠㅠㅠㅠ
“으, 피 많이 난다. 나 양호실 갔다 올게. 금방 올 테니까 밥 먼저 먹고 있어~”
멀쩡히 걷다 넘어져 피가 줄줄 흐르는 무릎을 쥐고 울상을 한 이사쿠가 조잘거리고는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다. 같이 가준다는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도리질을 치고 뛰어가버린 자리에 빨간 핏방울이
점점이 남았다. 센조는 조금 멋쩍은 심정으로 포근한 색깔의 머리채가 넘실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이사쿠가 품에 안겨주고 간 도시락에서 향긋한 음식 냄새가 솔솔 올라왔다. 그 머리
색깔만큼이나 달콤한 색의 도시락 통을 올려놓는데 비장한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센조. 나랑 얘기 좀 하자.”
천천히 고개를 들자 케마가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다.
무슨 얘기를 하자는 건지 대충 예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별로 듣고 싶진 않다.
“여기서 말 해.”
잠깐 케마의 미간이 볼썽사납게 찌푸려졌다가 도로 돌아왔다. 곧잘 있는 일이라 센조는 감흥조차 없었다. 그것도 찰나, 충분히 예상한 질문이 날아왔다.
“너, 이사쿠 좋아하냐?”
센조가 이사쿠를 처음 본 날은 입학식이었다.
보통 같은 반 친구가 되고서야 서로 얼굴이나 이름을 익히곤 한다지만, 이사쿠는 입학식부터 좀 눈에 띄었다. 다리에 손바닥만한 반창고가 세 개에 얼굴에 긁힌 자국이며
작은 반창고가 빼곡한 모습은 확실히 남달랐다. 반 별로 아이들을 줄 세우던 담임이 절뚝거리며 들어오던 이사쿠를
보며 짓던 그 미묘한 표정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으며, 얼기설기 줄을 서던 아이들은 이사쿠의 개성적인
등장에 흘끔거리기 바빴다.
─그 다음 순간은 비디오로 찍어 저장해 둔 것처럼 선명하다. 담임이 쭈뼛쭈뼛 다가가 뭐라고 걱정 어린 말을 건넸고, 이사쿠는 쑥스럽게 웃었다.
마침 해가 났고, 강당 창문 사이로 말간 햇살이 한 움큼 비췄다. 연한 갈색 머리카락이 빛을 받아서 보드랍게 반짝거렸고, 배시시 웃는 입술 사이로 오밀조밀한
이가 보였다. 무릎에 붙인 반창고에 발갛게 스며든 피의 색깔도, 쏟아지는
시선들에 발갛게 달아오른 뺨의 색깔도 참 따스해 보였다. 이사쿠는 뭐라고 담임한테 말을 했고,
가방을 고쳐 맸다. 담임은 멋쩍게 웃고는 이사쿠의 어깨를 툭툭 쳤다.
그 모든 풍경이 하나의 충격이 되어서 머릿속을 잔잔하게 흔들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이 지독하게 짧고도 강렬하게 각막을 스쳤다. 단언하건대, 그 짧은
광경은 센조가 살면서 본 가장 부드럽고 빛나는 순간이었다.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릴 정도의 컬쳐 쇼크였다.
멍하니 선 모습에 몬지로가 서서 조냐고 핀잔을 던질 정도로.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센조는 별달리 확실한 태도를
취하거나 사건을 만들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저 친한 친구로 지내는 것 만으로도 그 기억의 맑음은 바래지도,
지워지지도 않았으며 되려 작고 말간 장면들이 더 추가되곤 했을 뿐이었다. 긁어 부스럼이라고,
괜히 일을 만들었다간 그 모든 감각이 퇴색할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루하루 살다 보니 고 2가 되었다.
그 동안 센조는 이사쿠와 딱히 눈에 띄게 친해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았다.
그냥 가까운 친구 중 한 명으로 조용히 시간을 보낸 게 전부다. 그리고 학기의 끝이
다가왔다. 그 날 당번이었던 이사쿠는 애인이 생긴 케마 때문에 혼자 고요하게 교실을 지키고 있었고,
센조는 학교 뒤뜰에서 생판 처음 보는 여자아이가 덜덜 떨면서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고백 듣는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별 생각 없이 흘려 들으면서 거절의 말을 생각하던 와중에
한 마디가 와 박혔다.
“선배가 졸업하시기 전에 꼭 말하고 싶었어요.”
졸업.
이제 곧 보충도 끝나고 겨울방학을 하고, 그러고
나면 고 3이었다. 졸업을 언제 하는지도 모르게 바쁘게 공부를 하고
시험을 치르다 보면. 그러다 보면?
그 이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대로 우리가
졸업하게 된다면, 센조는 자기가 어떤 존재로 이사쿠에게 남을 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친하지도, 사이가 나쁘지도 않은 친구 중 하나로 기억 한 구석에 남아서 가끔 케마하고
고등학교 시절 얘기를 할 때나 내 얼굴을 떠올리는 그런 사이가 된다고 생각하니 서운했다. 왜냐하면,
센조의 머릿속에는 아직도 그 작고 말간 장면들이 또렷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나는 좀 더 마음대로 행동해도 됐던 게 아닐까?
그 한 마디로 모든 것이 명쾌해진 기분이 들었다. 대충 거절의 말을 주워섬기고 노을에 벌겋게 달아오른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랐다. 등 뒤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센조는 그런 데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교실 문 앞에 숨을 몰아 쉬며 도착한 센조는 자물쇠가 걸려있지 않은 걸 보고 잠시 서서
숨을 가다듬었다. 마음이 편해졌다. 동시에 머리가 재빠르게 돌아갔다.
이런 막무가내인 감정을 풀어낸다고 해서 그 방법도 두서 없을 필요는 없었다. 센조는
기묘한 자신이 있었다. 교실 문을 조용히 열자, 올려 묶은 곱슬머리가
보였다. 문득 어린 왕자와 여우 이야기가 생각났다. 모든 것은 습관이라고
했던가? 예를 들자면, 그 동안 케마는 확실히 이사쿠의 습관이었다.
그렇다면 이사쿠에게도 자기라고 하는 습관을 만들어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잠들었나
싶어 조용조용 걸어 책상 앞에 서자, 이사쿠가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발간 눈가는 울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노을 때문인
걸까. 그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어쩐지 손 끝이 조금 따듯해졌다.
처음으로 잡아 본 이사쿠의 손은 생각보다 부드럽고, 작고 또 아주 포근했다.
열없는 말을 몇 마디 하는데도 이사쿠는 쉽게 까르르 웃었다. 집에 가는 갈림길 앞까지 줄곧 잡고 있던 손이 사라졌을 땐, 조금 허한 느낌까지 들었다.
그렇지만 딱히 뒷맛이 씁쓸하진 않았다. 센조는 집으로 가는 길 내내 생각했다.
이사쿠가 새로 가질 센조라는 습관에 대해서.
오늘로 4일째. 이사쿠와 센조는 같이 하교했다.
매일 집에 가는 길에 손을 잡았고, 갈림길 앞에
서기 전 까지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다. 이사쿠는 좀 쑥스러워하는 듯 하다가도 곧 적응해서,
손을 잡고 빙글빙글 장난을 칠 정도로 익숙해졌다.
점심도 같이 먹는다. 어차피 다른 놈들은 죄다
여자친구랑 같이 먹기 때문에, 이사쿠는 아무렇지도 않아했다. 지나가는
말로 말한 반찬이 도시락 안에 들어있는 걸 보면 작은 파장이 목 울대 근처에 일었다.
다만, 이 관계를 주위에선 꽤나 아무렇게 생각하는
듯 했다. 몬지로는 너 돌았냐, 속셈이 대체 뭐냐는 문자를 보냈다.
코헤이타는 이사쿠랑 많이 친해졌구나! 잘 됐어! 하고 씩 웃은 게 다지만, 케마는 5일째 되는 오늘,
진지한 얼굴로 짝 다리까지 짚고 서서 ‘얘기’를 요청했다.
“응.”
잠시 당황하나 싶던 센조는 어느 새 다시 서늘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케마는 자기가 방금 들은 말을 의심했다.
누가 누굴 뭐 해? 뭐? 어?
“나 이사쿠 좋아한다고.”
케마는 뭔가 말하려는 듯 몇 번이고 입을 열다가 도로 닫았다. 그 모습이 어릴 적에 보던 인형극 같아서 좀 비웃었더니, 답답한 표정으로 머리만 벅벅 긁다가
결국엔 벌컥 나가 버린다.
캔이 차게 식기 전에 왔으면. 손 안에서 미지근해진
녹차 캔을 굴리던 센조는 이어폰을 꽂았다. 라 비앙 로즈가 느리게 귓가에 울렸다. 작은 음량의 노랫소리 너머로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목소리가 따라왔다.
천천히 눈을 들자, 그 날처럼 발갛게 물든 무릎이 보였다. 그 색이 꼭 장미 꽃잎 색깔 같다는 생각을 하는 것 만으로도 인생은 충분히 장밋빛으로 반짝거렸다. 적어도 센조한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사쿠.”
“응?”
센조는 이어폰을 빼며 빙긋이 웃었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 웃는 얼굴이 천진하다.
“좋아해.”
발렌타인 데이까지 앞으로 3일. 새뽀얀 뺨이 붉게 피어 오르는 모습을 보던 센조는 온 진심으로, 인생은 원래 장밋빛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