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시치는 어두워진 창 밖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온갖 생각들이
번잡스럽게 뒤섞여 머리가 아팠다. 저 너머에서 올라오는 부연 연기에 마음이 덜컹 흔들렸다. 화장터가 마침 저 근처던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살살 문지르던 덴시치는 자세를 바로 고쳐
앉았다. 열어 둔 문 건너에 아버지가 서 있었다. 어둠을 등진 아버지의
얼굴엔 고질적인 피로가 켜켜이 쌓여 있었다. 덴시치는 그 얼굴에서 느껴지는 향수에 고개를 푹 수그렸다.
그런 덴시치의 앞에 앉은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뱉었다. 오른손을 들고 잠시 머뭇거리던
아버지는 곧 덴시치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아버지의 손은 유달리 컸다. 그 묵직한 중량감에 덴시치는 숨이 턱 막혔다. 어깨 위로 촘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학원을 그만두고 싶으면,”
아버지가 촘촘한 침묵에
밀도를 더했다. 잠깐 말을 멈추고
들이쉬는 아버지의 숨에선 알 수 없는 향내가 났다. 덴시치는 금세 알아챘다. 아까 장례식에서 내내 타오르던 향과 같은 냄새였다.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와도 좋단다.”
덴시치는 잠자코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제 어깨를 가만 쥔 손은
아까와 다를 바 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미세한 진동은 덴시치의 몸 속으로 울리며 수많은 의문들을 공명시켰다.
씁쓸한 답변이 그 공명 끝에 남았다. 덴시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더 이상 집 밖에 나가 있을 필요가 없는 거구나. 덴시치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눈짓으로 이유를 물었다.
“……기왕 시작한
공부니까, 끝을 보고 싶습니다.”
덴시치는 말꼬리가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그 결과는 썩 좋았다. 아버지는 이제껏 본 적 없는 표정으로 덴시치를 마주보았다. 그 표정에서 뿌듯한 감정이 흘러 들어오자 덴시치는 정말로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나는 아버지를
혐오해야 옳은 걸까, 아니면 이런 아버지가 주는 신뢰에 들뜨는 자신을 혐오해야 옳은 걸까? 이불을 꼭꼭 여며 주고, 머리를 오래 쓰다듬어준 아버지는 묵직한 질문과 정수리 위의 희미한
온기를 남긴 채로 방을 나섰다.
덴시치는 눈을 꼭 감고
잠을 청했다. 그렇지만 결과는 형편
없었다. 제대로 잠에 들지도, 곤히 잠들어 할아버지의 꿈을 꾸지도 못한
채로 날은 밝았다. 덴시치는 환하게 밝아 오는 장지문 너머가 원망스럽고도 고마웠다. 한시라도 빨리 이 모든 고통스러운 의문에서 벗어나서, 학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학원으로 가는 길은 유난히
그 꼬리가 길고 무거웠다. 덴시치는
새벽부터 일어나 저를 배웅하는 부모님이 영 낯설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도 장례식 이후로 꼭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마치 살아 생전 할아버지가 하듯, 상냥하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자애로운 눈길로 제 등을 배웅하는 두 사람은 어색하다 못해 이질감이 들었다. 덴시치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덧 멀리 멀어진 두 사람은 여전히 밖에 선 채로 덴시치를 배웅하고 있었다. 덴시치는
도로 앞을 보았다. 이 주제에 대해 계속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억지로
눈물을 눌러 참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버거웠기 때문이다. 덴시치는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할아버지의 얼굴이 벌써부터 기억나지 않았다.
온갖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걸은 결과, 덴시치는 저녁시간을 훌쩍 넘긴
때에서야 학원에 도착했다. 입문표에 대충 사인을 하고 들어서자, 저
멀리서 잠옷 차림의 사키치가 잰 걸음으로 덴시치를 맞았다.
“덴시치,
많이 늦었네. 들어가서 자자.”
제 짐을 대신 받아 들고
방으로 향하는 내내, 사키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러 아무것도 묻지 않아주는 사키치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아마 사키치는 어제도 오늘도 온종일 저를 기다렸을 터였다. 금세 잠들어 고른 숨소리를 뱉는
사키치를 가만 바라보던 덴시치는 조용조용 일어나 방을 나섰다. 어쩐지 속이 화해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학원으로 오는 내내 생각했는데도 할아버지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은 채였다. 마치 다
그린 그림 위에 물을 쏟은 듯, 부연 형상만이 답답하게 머릿속을 맴돌았다.
덴시치는 잠옷 차림으로
뒤뜰을 걸었다. 할아버지는 유난히
난초며 식물을 좋아했었다. 같이 산책을 나가 온갖 나무며 꽃 이름들을 하나하나 일러 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낙이었다. 그리고 그건 동시에 제 낙이기도 했다. 뒤뜰 곳곳에 핀 화초들이
밤바람에 살랑대며 흔들렸다. 그 잎사귀를 살짝 쓸던 덴시치는 치미는 울음을 삼켰다. 풀 이름은 기억이 또렷했어도, 할아버지 얼굴은 여전히 희미했다. 밝은 달빛 아래 조용히 저무는 꽃봉오리들이 더 서글펐다. 그러고 보면 아버지는 꽃을 좋아했던가
하는 쓰린 궁금증이 이는데, 발 밑이 일순 푹 꺼졌다. 몸이 허공에
붕 뜬다 싶더니 얼얼한 충격이 일시에 덴시치를 끌어안았다.
함정 안은 퍽 깊은 모양인지, 달빛조차 제대로 들질 않아 컴컴했다. 얼얼한 다리를 주무르던 덴시치는 왈칵 복받치는 울음을 참지 않았다. 서러웠다.
모든 게 이렇게 아프고, 싫고, 애통했다.
이 모든 감정이 힘들고 또 힘들어서 아직 덜 자란 어깨며 허리뼈가 바스러질 것 같았다. 여기라면 아무도 저 우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 같았다. 그 사실만이 큰 안심이 되었다. 나는, 할아버지를,
아버지를, 어머니를. 문장이 채 되지 못한
울음소리가 목구멍을 타고 뜨끈하게 올라왔다. 흙이 묻어 지저분한 손은 금세 눈물로 척척하게 젖었다.
덴시치는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마음껏 울었다. 저는 아직 젖내나는 어린애였다.
그 사실이 너무 싫었다. 내가 만일 다 자란 어른이었다면, 할아버지 얼굴도 또렷하게 기억하고, 아버지한테 뭐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알고,
또 어머니가 남기는 그 기이한 감각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모든 것이 그저
답답하고 슬프고 아팠다.
그렇게 한참을 섧게 우는데, 희미하게 비치던 달빛이 뚝 가로막혔다.
덴시치는 무심코 위를 올려다
보았다가 깜짝 놀라 울던 것마저 멈추고 딸꾹질을 했다.
새카만 와중에 색이 연한
눈동자가 한 쌍, 반득거리면서 덴시치를
가만 보고 있었다.
어둠에 눈이 익자 그제서야
그 사람이 제대로 보였다. 덴시치는
딸꾹질을 억지로 집어 삼켰다.
“아,
아야베, 서, 선배.”
하긴 이런 데에다가 함정을
파 둘 사람은 전교를 통틀어 딱 한 사람밖에 없었지만, 이 밤중까지 안 자고 함정을 파고 있었을 줄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 덴시치는 아직까지도 놀란
채였다. 뭐라고 대답을 해 줄 법도 했건만, 아야베는 아무 말도 없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덴시치는 그제야 온갖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내가 우는 소리가
시끄러워서 선배가 눈치 챈 걸까 하는 생각에 다시 눈물이 핑 도는데, 아야베가 노상 가지고 다니는 삽을 근처에
푹 꽂더니 함정 안으로 훌쩍 뛰어내렸다. 덴시치는 깜짝 놀라 뒤로 붙어 앉았다. 이 사람이 뭘 생각하는가를 도통 모르겠다고 느낀 적은 있었지만, 이건 도가 지나칠 정도의 현장경험이었다.
정말 입때껏 내내 땅을 파고 있었는지, 아야베는 교복 차림 그대로였다.
너무 놀라 기껏 삼킨 딸꾹질이
도로 기어 나왔다. 아야베는 잠깐
덴시치를 빤히 보더니, 함정 안에 풀썩 주저앉았다. 덴시치는 그 탄탄한
등을 보며 한참 딸꾹질을 했다. 밝은 보라색 교복은 어두컴컴한 함정 안에서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흙이 묻어
있었다. 덴시치는 그 등을 가만 보았다. 그러고 있자니 또 눈물이 꾸역꾸역
비집고 올라왔다. 이미 한 번 물꼬를 튼 눈물은 거리낄 것이 없었다. 소리를 죽이고 훌쩍거리던 덴시치는 어느 새 그 등에 기대 앉아 있었다. 억지로 눌러 담던 울음소리는
점점 제 귀에도 선명히 들릴 정도가 되었다.
아야베는 아무것도 말하지도, 묻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제 우는 모습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그 무심함에서 풍기는 보드라움이 서러운 마음을
가만히 얼렀다. 물집이 가칠하게 잡힌 손이 눈물로 척척한 제 손을 슬그머니 쥐었다. 덴시치는 다른 쪽 손으로 눈물을 쓱 훔치다가 또 왈칵 울었다. 그 손의 체온이 할아버지의 체온과
꼭 닮아있어서, 그래서 자꾸자꾸 눈물이 났다.
그렇게 우는데, 머릿속에 부옇던 할아버지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씻기었다.
덴시치는 어느 샌가 또렷하게 맑아진 그 얼굴을 떠올리며 잠들었다. 등 뒤에 선명한
온기는 괜찮다고 얼러 주던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되어서 깊은 꿈 속을 울렸다. 괜찮아, 아가야. 이 할애비는 괜찮아.
덴시치는 그제야 웃을 수
있었다. 저도 괜찮아요.
이제, 진짜로 괜찮아요. 낯설고 희미한 웃음
소리가 꿈 속에서 맑게 흔들렸다. 그렇게 새벽이 밝았다.
연성사담: 덴시치는 나에게 있어서 진짜 애다 애. 완전 꼬맹쟁이 애...1학년 애들은 일단 다 그렇지만,특히 덴시치는 자존감이 미묘하게 낮아보여서...거기다가 은근히 겁도 눈물도 많은 애라는 게 진짜 애스럽다. 평소에 애 티가 안나는 건 어디까지나 같은 연령대 꼬마들 사이에 있어서 뿐인 것 같음. 같은 나이대 애들 사이에서야 퍽 어른스러워보이고 점잖고 그런데 사실 나이차 훌쩍 나는 어른이나 선배가 궁디토닥토닥해주고 한번만 꼭 안아주면 눈물이건 어리광이건 못 참고 전부 쏟아낼 것 같다. 헤이덴이 미묘하게 겉도는 것도 어디까지나 덴시치도 헤이다유도 너무 애스러워서라고 생각함. 덴시치의 경우는 케미나 본인의 상성으로만 놓고 보면 어른이나 선배가 더 해피엔딩이긴 하다. 특히 덴시치는 상명하복 기질도 은근히 있고 어리광 피우고싶은 걸 굉장히 꾹꾹 참는 타입일 거 같아서....그러니까 누나한테 어리광 피우면 좋아요ㅇㅇ?? 아야베는 사실 손을 잡아주기보단 그냥 등을 빌려줄 것 같지만, 원작에서 물집 떡밥을 깔아주길래 그냥 주워먹었다. 엔고자님 감사합ㅂ니다ㅏㅏ근데 그거랑은 별개로 나 덴시치 울리는거 진짜 존나게 좋아하는듯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