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와카이] 두 걸음 뒤에 (5)
완결은 그리니치 시간대 기준 화요일 안에 내려고 하고 있습니당
정사가 모두 끝난 깊은 새벽. 노곤하고 피로한 몸으로도 카이는 누워 잠을 청하지 않았다. 젖었던 입술은 새벽 한기에 그대로 버석하게 말라 갈라지고, 그 위를 잠시 매만지던 손가락은 핏기 없이 희었다. 카이는 가만히 일어나 곧장 욕실로 향했다. 등 뒤를 좇던 시선은 문을 닫자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 동시에 참았던 한숨이 탁 터져 나왔다. 폐 속 가장 깊게 고인 습한 공기가 일제히 빠져 나오고, 흉부가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대충 걸쳐진 채 온갖 체액으로 젖은 셔츠를 대충 벗어 던져 두고, 샤워 부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금세 어깨며 머리 위를 푹 적시는 뜨끈한 물. 카이는 무표정인 채 레버를 우로 길게 틀어 돌렸다. 김이 뿜어져 나올 정도로 따스하던 물은 금세 차갑게 식었다. 온 몸의 솜털이 쭈뼛 일어서는 차가운 온도.
카이는 그렇게 찬 물을 맞고 가만 서 있다가 서서히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눈가가 시큰하게 저려 오고, 얼굴로, 턱으로 흘러 지나 수챗구멍 속으로 영영 사라지고야 마는 액체. 그 액체만이 체온이 있었다. 혼자 뜨겁고 짜갑고, 그렇게 홀로 모든 농도가 강렬했다. 핏기가 싹 가셔 창백하게 식은 몸을 따라 지나 어디론가 섞여 지나 버리는 그 행렬에 뒤섞이고 싶었다. 차가운 물 넘어가는 대로 꿀럭꿀럭 넘어가는 시커먼 생각들. 친구와 잤다. 아니, 정확히는 친우를 강간했다. 저항을 닮은 설득이나 위로를 하지 못하도록, 이런 무딘 폭력 사이에 금 간 마음을 감추고는 한껏 마음대로 굴었다. 미와의 입술은 더웠고 뺨을 기대어 본 몸은 그 어떠한 상상보다도 황홀했다. 뺨에, 목에, 몸 가장 깊은 곳에 할퀴듯 남고 지난 미와의 온도가, 체향이, 그 욕망이 눈물이 맺히도록 기뻤다.동시에 바닥을 모르고 역겨웠다. 다름 아닌 자신에게 구역질이 났다.
별 말 없이 가게 앞에 멀거니 서 있기만 해도 웃는 낯으로 맞아 주는 이. 무언가 걱정거리가 있느냐고 상냥하게 돌리고 돌려서 물어보는 이. 이제껏, 그리고 아마도 영영 가질 수는 없을 반짝이는 따스한 사람.
묻는 말에 몇 번이고 목이 탁 메어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대신 목구멍을 넘어 가는 술은 썼고, 주머니 속에 든 캡슐 하나가 기어코 마음을 뒤흔들었다. 잠이 오지 않는 자신이 먹는 약. 안 보는 사이에 술잔에 살짝 흘려 넣는 것 만으로도 세상 모르고 잠들게 하는 약. 그는 참 곱게 웃었다. 자신이 무슨 시커먼 속내로 술잔을 마주하고 앉았는지, 지난 추억을 어떤 식으로 머릿속에서 유린하고 그리워하고 애가 타도록 부르짖는줄도 모르고 그저 배싯 웃어 보이는 사람. 그 사람과 잤다. 일부러 한 일이었다. 끝 간 데를 모르고 비뚤어지고 비틀어진 마음이 시킨 일이었고 자신이 따른 일이었다.
무엇을 잘 했다고 눈물이 나오는가. 제가 한 일 무에가 그리 섧어서 소리를 삼키고 우는가. 그렇게나 그리워하고 그려서 추억이 해지도록 욕정했던 주제에. 그런 주제에 먼저 얼굴 비치고 달콤한 소리 한 번을 기어코 못해서 이리 가장 쓰고 거친 길을 가는 사람이 곧 자신이었다. 한참도 전에 가져 본 부모를 제외하고는 가장 맹목적인 내 편이던 사람이었다. 혹여나 그 균형이 깨져서, 그래서 그 손을 놓치게 될 까봐서 지독하게 겁이 났다. 그런 생각이 내내 행동에, 말에 가시를 달고 발을 걸었다. 하려던 말은 채 입 밖은 커녕 잇새까지 와 닿지도 못하고 졸업을 했다. 그렇게 되기가 무섭게 확 멀어지는 거리. 비단 물리적인 거리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조급증이 나도록 불안했다. 네 마음 속에서 매일 한 걸음씩 밀려 나가는 나의 자리. 어떻게 해야 다시 되찾을 수 있을지, 그 한복판에 쉴 수 있을지를 가늠해 보아도 매일 불안만이 웃자랐다. 그럴수록 시커멓게 같이 자라는 욕망. 어둔 밤이면 뒤섞여 떠오르는 생각들. 따스하던 추억. 바닥을 모르고 깊어지는 불안과 폭력적인 상상들. 왜 곁에 없는지 밤새 역정을 내고 베개를 쥐뜯어도 없는 이는 없는 이였을 뿐이다. 그 사실을 절절히 알기가 무섭게 자신 안의 바닥이 푹 꺼졌다. 그리고 그 한참 깊은 속을 홀로 걷다가 도달한 끔찍한 종착지가 여기였다. 바로. 지금 여기.
소나기처럼 퍼붓는 찬 물 아래, 카이는 이제는 결코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애초에 알고 시작하지 않았느냐는 얄팍한 위로가 잠시잠깐 스치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마음 속에서 나는 잃은 사람일 것이다. 내가 그를 한 번 잃었듯, 그 안에서 내밀린 잃은 자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매어둘 수 만이라도 있다면.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샤워기 물을 멈추었다. 체온이 급격하게 내려 간 모양인지 입술이 덜덜 떨렸다. 거울에 비추는 모습은 사람이 아닌 유령같기만 했다. 창백하고 해쓱한 얼굴. 눈 밑에 푸르스름하게 새벽을 따라 남은 불면. 새파랗게 질린 입술. 말 그대로 자신은 유령이었다. 과거의 망령. 가장 찬연하던 기억 틈새를 비집고 기어나와 기어코 아침까지 저주를 속삭이는 귀신 같은 그림자. 햇빛 따라 너울대다가 영영 사라지고야 말 그런. 카이는 느리게 눈을 깜박였다. 아까 흘린 눈물이 남긴 흉 같은 뻐근한 고통이 따라오고, 멍한 머리로 몇 번이고 되뇌어 생각했다. 아침이 오기 전까지 일렁거리고 맴돌자고. 조금만 더 너를 붙잡아 두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