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덴] 첫눈
6학년 설정+일시적 실명 소재 주의
일시적인 것 뿐이니까, 너무 걱정 할 필요는 없단다.
다정한 니이노 선생님의 말을 끝으로 덴시치는 홀로 남겨졌다. 다들 수업에 한창이겠지. 오늘은 실습이 있는 날인데. 그런 생각이 별 의미 없이 지나갔다. 눈을 아무리 깜박여 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밀도 높은 어둠 뿐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왈칵 서러웠다. 혼자 있는지도, 아닌지도 모르는 설은 어둠은 두려웠다. 열 다섯살이 견디기에는 조금 많이 버거운 일이었다. 울지 않으려고 입 안을 콱 깨물자, 애매한 따가움이 곧바로 느껴졌다. 두툼한 이불 아래로 얼굴을 숨기고서야 조금 편안해졌다. 그 속에서는 어둠이 당연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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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일 아닌 것에서부터 가장 섧은 일은 시작되었다. 작법 위원회 일로 자기에 몰약 비슷한 것을 발라 굽게 되었고, 아마 농도 조절을 잘 못했던 모양이다. 콧속이 얼얼한 냄새. 가마에 닿기가 무섭에 팍 흩날리는 어두운 잿빛 연기. 그것이 덴시치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색채가 있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침상에서 눈을 떴을 때엔 세상은 새카맣게 변한 이후였다. 밤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등을 켜 달라고 청했고, 돌아오는 것은 껄끄러운 침묵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안 좋은 소식들. 덴시치, 나 안 보여? 가늘게 떨리는 사키치의 말소리. 기어코 울음이 터진 듯, 훌쩍이는 소리는 아마도 잇페이이리라. 덴시치는 말로 답하는 대신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한층 더 묵직하게 내려앉는 침묵.
니이노 선생님에 의하자면 약품의 독성 때문에 잠시 시력을 잃은 것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 한동안은 몸 상태가 좋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 쓰게 달인 탕약을 하루에 두 번가량을 마셔야 했고, 새벽에는 구역질이 나고 어지러워서 누워만 있어도 기운이 빠졌다. 독성이 빠져 나가려면 한동안은 이렇게 지내야만 한다고 했다. 그러고도 안 나으면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니이노 선생님은 맥 없는 목소리로 글쎄, 그런 생각은 하지 말자꾸나, 하고는 말았다. 글쎄. 글쎄. 밤새 메아리치는 슬픈 말. 덴시치는 처음으로 울었다. 동실을 쓰는 사키치가 깰 까봐서 입술을 깨물고, 베개에 고개를 푹 파묻고 한참을 울었다. 울어서 지친 몸임에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어지러움은 더했다. 헤매는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물체도 색도, 일말의 빛도 없이 그저 어지럽기만 해서는 현재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친구들은 필요 이상으로 상냥했다. 밤이면 그 날의 수업 내용을 읽어 주고, 어지럼증에 잠 못들고 그저 누워있는 밤에는 이불을 턱 끝까지 여며 덮어주었다. 식사 때마다 몰래 죽을 들고 들어와 말 없이 떠 넣어주는 것 또한 친우 중 한명이리라. 익숙한 사키치의 목소리가 안도 선생님을 흉내내며 교본을 읽을 적에는 자기도 모르게 웃어 버리기도 했다. 그리고 히코시로가 미안하다는 듯, 작게 말했다. 며칠간 실습 때문에 이반 전체가 먼 성으로 나가 있어야만 한다고 했다. 덴시치는 별로 답할 말이 없었다. 그래. 몸 조심해. 살짝 손을 쥐었다가 놓는 온기. 몇몇개의 손가락들. 그 날 밤에 떠난다고 했다. 닫기는 문 소리. 덴시치는 멀거니 앉아 문이 있을 위치를 보았다. 아마 이런 꼴만 아니었더라도 자신 또한 그 대열에 함께였을 것이다. 함께 짐을 꾸리고, 이것저것 이야기를 하곤 같이 문을 나섰을 것이었다.
다시 혼자였다.
혼자 어둠 속에 고스란히 남겨진 기분은 별로 좋은 느낌은 아니었다. 추운 밤, 담 그림자 속에 숨어 이동할 친우들의 안위 따위가 얼마간 상상화처럼 그려졌으나 그나마도 오래 가지 않았다. 좋아하는 독서도, 예습 복습도 그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가끔 누군가가 들어와 몰래 들려주곤 했던 그 날의 이야기도, 홀로 구역감에 잠들지 못하는 밤 앞에서는 그저 불안감일 뿐이었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불안심이 다시금 손목을 잡아 채었다. 낫지 않는다면? 일평생 이런 짐으로 살아야만 한다면? 일부러 묻어둔 채 보지 않았던 질문이 날카롭게 머리를 휘저었다. 아. 괴롭다.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명확하게 들었다. 괴로웠다. 들을 이 없이 홀로 고통에 몇 번이고 뒤채는 모양새는 가벼운 몸부림처럼 보일 것만 같았다. 그 순간을 뚝 멎게 하는 소리가 있었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사키치?”
잊고 간 물건이 있는 걸까. 덴시치는 빠져 나온 제 목소리에 흠칫 놀라고야 말았다. 정말 환자인 것처럼, 힘이라곤 없는 쓸쓸하고 유약한 소리. 길게 늘어진 머리카락이 뺨에 그대로 닿았다. 방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걸어 들어왔을 뿐이었다. 바깥 냄새가 확 옮아 들어왔다. 추운 날이었다. 장작을 땔 터였다. 나무 탄 냄새 하며 사람 냄새가 와륵 몰려 들어왔다. 어째서 아무 말도 않는걸까. 곁에 가만 앉은 방문자는 자신이 누군지 밝힐 의향이 전연 없는 듯 했다. 목소리 한 번 내는 일 없이 바로 옆에 앉은 이는 누운 덴시치의 뺨을 잠깐 쓸었다. 밖은 어지간히 추운 모양이었다. 차갑게 언 손. 굳은살이 마디마다 뚜렷한. 누군가의 이름이 아주 짧게 스쳐지나갔으나, 덴시치는 그런 스스로를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비웃으러 오는 일이 아니고서는 방문 자체를 하지 않을 이였다. 손가락은 얼마간 뺨을 쓸어 내리더니 머리카락을 간질거리듯 헤집었다. 등을 받치고 살짝 일으키더니, 풀린 머리를 단정하게 모아 내려 묶어주는 손길. 조금은 서툰 모양새. 덴시치는 어째서인지 별 말을 하지 못했다. 누구냐고 다그쳐 묻지도, 짜증을 내지도 못하고 그저 얌전히 그 손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불안해서였을까. 아픈 만큼 마음이 약해져서 그러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을까.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그 손은 따스했고 또 확실했다. 현재 가장 딱 필요할 만큼의 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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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모를 사람은 그 이후로도 자주 들렀다.
이반 친구들이 전부 떠난 나날동안 꼭 비우지 않고 들러서 죽을 떠 넣어 주고, 약을 입가에 대어 주고 밤이면 머리를 빗어 묶어 주고는 손을 잠시간 잡아 주었다. 낮 시간에 홀로 가만히 깨어 앉아있자면은 익숙한 발소리가 조심조심 걸어 들어와 손에 사탕 몇 알을 쥐여주고 떠나기도 했다. 아이 대하듯 하는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면, 소리 없이도 웃는 것이 느껴졌다. 빙긋이 웃는 얼굴일 터였다. 모르는 사람이어도 그저 고마웠다. 덴시치는 가끔 말했다. 보이지 않아서 더 솔직할 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고맙노라고. 그렇게 말하면 그 사람은 잠시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뺨을 엄지로 문지르듯 쓸고, 그리고는 다시 나간다. 덴시치는 금세 외웠다. 발걸음 무게가 쏠리는 소리. 매번 품 안에 옮아 들어오는 바깥 냄새들. 덴시치는 그 발걸음 소리가 복도 코앞에서 들릴 적마다 살짝 설렜다. 혼자가 아닐 수 있다는 것에의 단순한 기쁨만은 아니었다. 맹목적이기까지 한 다정한 보살핌. 최고학년이 되어서는 좀체 부릴 일이라곤 없는 어리광을 묵묵히 받아 넘기는 따스한 품은 일종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기까지 했다. 그 사람은 아마 새벽에도 가끔 들르는 모양이었다. 이불을 끝까지 꼭 여며 덮어주거나, 입술께를 가만 맴돌고 유령처럼 사라지는 새벽녘의 온기는 악몽과 불면을 쉽사리 지워 버렸다.
그 날 또한 그런 날이었다. 유난히 어지럽고 잠이 오지 않았다. 낮에는 속을 두 번이나 비워내고야 말았고, 피가 머리로 몰려 욱신거리는 와중에 눈물이 따갑게 스몄다. 그런 날이었다. 낫지 않으면 어쩌지. 늘 눈이 먼 채면 어떡하지. 막막하도록 바닥 없는 불안감이 스멀거리고 밤을 덮쳤다. 너무도 불안하고 막막해서 가만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스럽고 싫었다. 애초에 이 모든 이유가 자신의 실수였다. 탓할 사람 하나가 없이, 그저 그렇게 스스로만을 탓하고 후회하는 나날은 점점 견디기가 힘들어졌다. 매일 다정스럽게 쓰다듬는 손길도 약자에게 향하는 배려이고 선심일 뿐이지 않은가. 혼자 이 방 밖으로 한 걸음 나설수도 없는 자신이란 어떻게 그렇게 한심한지. 공기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먹먹한 느낌. 어쩐지 모를 오기가 솟았다. 밖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침상 바로 옆 벽을 더듬어 짚고 섰다. 온전히 두 발로 서 걸은 것이 언제던가. 어쩐지 덜덜 떨렸다. 이게 정말 내가 앞으로 살아 견뎌야만 하는 것이라면. 영영 낫지 않는다면. 급격히 치미는 구역감. 덴시치는 조금 울었다. 다시 눕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벽을 짚고 서서는 한 발짝도 디디지 못하고 그렇게 한참을 주저만 했다. 무서웠다. 그냥 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리고는 다시금 문 열리는 소리. 드르륵. 덴시치는 반사적으로 고갤 들었다. 장지문이 바로 보여야만 하는 위치. 그리고는 절망했다. 보아도 보이지 않는데 뭐 하러 고개를 매번 돌리는가. 그래서 더 섧었던 모양이다. 와르륵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머릿속이 끔찍하게 어지러웠다. 그 사람이 채 발소리도 죽이지 못하고 뛰어서 왔다. 다시금 코 끝에 확 풍기는 차가운 바깥 냄새. 그리고 이제 구분할 수 있게 된 체향. 먼지 냄새를 닮은. 단단한 팔이 확 뻗어 겨우 선 몸을 감싸 앉혔다. 휘청거리던 몸이 기울어 품 안에 잠겼다. 심장 소리가 났다. 따뜻했다. 겨우 붙들고 있던 이성이 와르르 무너지고, 눈물이 끊기는 일 없이 뚝뚝 흘렀다. 덴시치는 한참을 울며 말했다. 아니,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그저 푸념이나 넋두리에 한없이 가까운 것이기는 했다. 안 나을거야, 평생 이러면 어쩌지. 정말 아무 것도 안 보여. 깜깜해. 한참을 그렇게 잠기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그 끝은 아주 작은 소리로 맺어졌다. 무서워.
그 사람은 처음으로 한숨을 쉬었다. 병수발을 들 적에도 별 기척도, 이렇다 할 소리도 내지 않던 이가 처음으로 내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괜히 더 서러웠다. 한심할 터였다. 제 실수로 제 몸을 망쳐 놓고는 남에게 섧게 한풀이를 한다. 저 혼자서는 한 발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주제에. 제 앞가림 하나를 못 해서 남이 식사를 떠 넣어 주어야만 하는 주제에. 굳은살이 꺼끌하게 배긴 손가락이 눈물을 닦았다. 덴시치는 처음으로 손을 뻗었다. 익숙한 질감의 옷을 손가락으로 스쳐 보고, 그리고 손가락을 올려 얼굴을 쓸어 보았다. 피부의 감촉. 온기. 조금씩 더듬어 나갔다. 이 이상 알아나가는 건 안된다는 듯, 손가락이 손을 말아 쥐곤 내렸다. 덴시치는 순순히 손을 맡기곤 품에 고개를 기댔다. 그에는 조금 당황한 듯, 뺨 아래 근육이 뻣뻣하게 긴장하는 것이 느껴졌다. 덴시치는 손가락을 꼼질거리고 움직여 보았다. 말아 쥔 손바닥 안이 간질거리도록 스쳤다. 가만히 그렇게, 기댄 채 몸을 붙이고 앉아 한참을 그냥 있었다. 심장 소리가 귓가에 나즉하게 울렸다.
덴시치는 조용히 눈을 깜박였다. 한참을 주저하듯 맴돌다가 입술께로 살짝 내려오는 얼굴. 입술에 말랑하게 와 닿는 온기는 곧 숨 찬 애정으로 퍼부었다. 덴시치는 가만히 생각했다. 머릿속이 눈발 날리듯 뿌옇다. 지독히 추운 밖에는 아마 눈이 올 테고, 여즉 한 번도 눈을 보지 못한 덴시치에게는 처음 볼 눈이 곧 첫 눈인 셈이었다. 끊이는 일 없이 입술을 맴도는 온기. 덴시치는 속으로 몰래 생각했다. 불안이 걷힌 마음 속은 눈밭처럼 희었다. 나을 것이었다. 언제가 되건, 꼭 다시 또렷하게 볼 수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러면, 그런 날이 오면 마주하고 말을 할 것이었다. 첫 눈발이 펑펑 날리는 복도를 떨며 지나서, 네가 그러했듯 새벽에 몰래 찾아가 이불을 여며주고는, 귓가에 작게 소근거릴 것이었다. 고마워. 헤이다유.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