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고이면 썩는다. 물처럼 한 방울씩 방울져 떨어져 한 데에 고여선, 흐르는 일 없이 괴기만 한 게 몇 년이다. 물도 오래 두면 썩는다. 이끼가 끼고, 시커멓게 상한다. 마음도 썩는구나. 쉬고 상하는구나. 그런 사실을 알게 된 다는 건 딱 그만큼 저린 아픔을 동반했다. 몰라도 될 사실. 하지만 굳이 파헤쳐서 기어코 보고야 마는 것들. 미와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떴다. 후회한다. 말을 솎아내지 못함을. 마음을 추스릴 수 없음을. 그럼에도, 그만둘 수가 없음을.
―나는?
그런 질문은 애초에 하지 말았어야만 했다. 억지로 장난기를 섞어 냈음에도 불구하고 말 끝이 형편없이 떨렸다. 너는 그 떨림까지 잡아 챘을까. 일견 무표정하게만 보이는 표정 뒤에 살짝 놀란 듯한 기색이 힐긋 비어져 나왔다. 동시에 마음 속으로 조소. 얼마나 너를 보고 있었으면, 보고만 있었으면 다른 사람들은 눈치도 못 채는 기색 하나, 표정 하나까지 제 것처럼 알아볼 수가 있을까. 카이는 살짝 눈을 내리 깔았다. 섬세하게 드리우는 속눈썹 그림자. 사이로 살짝만 비추는 선명한 눈동자. 좋아하는 광경이다. 그만큼 불안했다. 열어 둔 창문에서 묵직한 습기를 태운 바람이 들어왔다.
짧은 초가 몇 번 돌고, 카이가 작게 말했다. 메이트.
예상했던 답안이다. 어쩌면 모법 답안이기도 했다.
맞아. 메이트. 친구.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듣고 나서 마음 중앙이 푹 패인다. 밑에서부터 깎여 내리듯, 투둑하고 가루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부서져 내릴 것이다. 바닥 없는 욕심이, 욕망이 기어코 아가리를 벌리려고 했다. 인정해야 했다. 자신은 아직 어렸다. 어리고, 또 아직 자신을 놓은 헌신만을 하기엔 자기가 처연하도록 가여웠다. 쏟아부은 마음만큼 돌려받길 원한다는 게 아니다. 그저, 그저 한 번만이라도, 카이 안에 있는 계단을, 딱 한 계단 만큼이라도 위로 올라가고 싶던 것 뿐이다. 그럼에도 확인한 후에는 늘 그랬다. 다른 사람들과 같은 층계참 위. 위도, 아래도 아닌 그 중간점 어딘가에 멀거니 서 있는 자신. 억지로 웃음 소리를 내어 보았다. 공허하게 울린다. 곧 죽어도 나도, 라는 말은 나오질 못했다. 아니다. 이런 제 살 발라먹는 끔찍하도록 괴로운 게 친구일 순 없었다. 그래서 짧은 웃음소리와 허한 맞장구만 남기고 등을 돌리기로 했다. 집에, 방에 돌아가고 싶었다.
"미와, 저녁..."
어쩜 그렇게 못 놓게 하는지. 차라리 에일 정도로 차가웠더라면. 그랬더라면 지금과는 다른 상처만 입고 끝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딱 아쉽고 서운해지는 자신이 또 있다. 아. 끔찍해.
"미안. 오늘은 나도 집에서..."
말함과 동시에 어깨에 살짝 닿는 손이 있다. 그러지 마. 제발. 빌고 싶은 마음이 흉포하게 날뛰었다. 그리고 귓가에 가깝게 들리는 소리. 늘 그랬듯 아슬하게 사랑스러운 높낮이를 타고 불리우는 이름. 미와. 첫 글자를 따라 쭉 하강하는 음이 머릿속을 콱 헤집고 놓질 않았다. 메이트. 아마 나는 평생 그 자리이겠지. 네가 부르는 이름자 하나에 설레는 삶을 줄곧 살고, 그렇게 또 줄곧 피가 나고, 딱지가 앉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조건 반사적인 슬픈 습관. 이름이 불리우면 고개를 돌린다. 그것이 네 목소리면 더더욱. 그리고 보았다. 빤히 보는 눈. 이 모든 어색하고 뒤틀어진 행동의 행방을 묻는 듯, 고요하고 차분하게 서서 의문하기만 하는 모습. 일순 복받치듯 억울했다. 너야. 네가 이렇게 만들었어. 말로 끄집어 낼 용기도 없었기에 그저 다시금 픽 웃으며 말했다. 미안. 돌아갈게.
오늘의 너는 포기를 좀체 모르는 듯 했다. 그도 아니면 단순히 이 모든 어색함을 추궁하고 싶은 것 뿐일까. 손가락이 손목 근처를 톡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왜. 짜증을 부리듯 걷어 내자 제법 매서운 소리가 났다. 아차 싶었다. 진짜로 놀란 얼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발갛게 열이 몰리는 눈가를 눈치 챈건지, 카이가 성큼 다가왔다. 어디 아프냐는 듯, 다정하게 물으려는 듯. 고개를 숙이자, 카이가 고개를 따라 기울였다. 자신도 모르게 그 어깨를 힘을 주어 그러쥐었다. 손 안에 확실하게 존재하는 체온. 질량감. 손바닥 아래에 버석거리고 쥐이는 교복 셔츠의 흰 빛깔. 그리고 카이의 고개를 따라 고개를 기울였다. 손 아래 쥐인 어깨가 쉬이 알 정도로 굳는 것이 느껴졌다. 어차피 그런 사람으로만 남을 거라면.
그만 두고 싶다는 일견 폭력적인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놓지도, 끌어안지도 못하는 이 답답하도록 괴로운 것을 이런 사나운 방식으로라도 맺음표를 끊어 내고 싶었던 것 같기도 했다. 그런 건 정작 그 당시엔 중요치가 않았다. 입술 안에 밀려드는 체온은 죽도록 황홀했다. 어줍잖은 상상보다도 더 확실하게 점막을 스치는 온도가, 그 부드러운 감촉이 사람 마음을 또 뒤흔들었다. 한 걸음만 더.
너에게 조금은 다른 사람이고 싶었다. 나에게는 조금 다른 사람인 너를 보고 싶어서 그랬다. 그러니까, 한 걸음만 더.
얻어 맞을것이라고 생각했다. 의외로 기운이 있는 녀석이다. 사납게 아랫배를 걷어 차이거나, 턱이 돌아갈 정도로 주먹질을 당하면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만두게 해 준다면. 꼴 사나운 모습 그대로 영영 사라지게 해 주기야 한다면. 그러나 품 안의 카이는 정말 놀라고 당황한 듯, 차마 어깨를 밀어 낼 줄도 모르는 채였다. 안 돼.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이 파고 들 기회를 그만 주라고, 차라리 늘 견고하라고 속으로 속삭였다. 들리지 않는 원망. 그래서 더 마음대로 하기로 했다. 목에 얌전히 매인 넥타이를 손가락을 걸어 내렸다. 내가 주었던 타이. 내가 직접 매 주고는 했던. 미와는 스스로가 조금 웃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스스로의 표정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다. 하얗게 질려 눈 앞에 존재하는 네가 몇 배쯤은 더, 더 중요했다.
"미,와....그만..."
미안. 늦었어. 대답을 작게 귓가에 속삭이자 뻣뻣하게 굳은 어깨가 움츠러든다. 미안해. 아니 사실은 글쎄, 어떨까. 미안한걸까. 미와는 그렇게 생각하며 앞치마 매듭을 풀어 내었다.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흩어지는 천의 감촉. 입술에 달게만 닿는 피부는 생각을 멈추기에는 딱 좋았다. 알고 있다. 너는 잃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지금 나를 내치는 것이 힘들고. 그 틈을 부득부득 비집고 들어가서 이런 짓을 하는 자신은 뭘까. 뭐긴 뭐야. 눈 먼 괴물이지. 조급증이 치달았다. 바지 지퍼에 손을 대자 처음으로 손목이 붙잡혔다. 미와는 다시 웃었다. 무서워? 카이가 뭐라 말하려는 듯, 입술을 열었다. 틈을 주지 않고 다시금 입술을 내렸다. 혀 끝에 매끈하게 닿는 아랫니가 참 마음에 들었다. 숨이 가빠질 때까지 입 안을 마음껏 휘두르고는 작게 속삭였다. 내가, 무서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닫아 버리는 게 또 머릿속을 울린다. 이제 정말 제 멋대로 구는 일만 남았다.
"으, 흐윽...잠..ㄲ..."
그 어떤 말도 손을, 몸을 멎게 하진 못했다. 대충 손가락으로 장난질을 친 것 만으로는 아플 것을 안다. 그럼에도 그냥 몸을 밀어 넣었다. 등에 따끔하도록 세워지는 손톱은 생채기를 내지는 못했다. 맨살이 아닌 옷 위로는 그닥 아프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흠칫하고 몸을 물릴 뻔 했다. 네가 아픈 것 같아서. 이런 것이 구역질이 난다는 것이다. 눈 앞이 벌겋도록 피가 몰렸는데, 머릿속이 체향으로 어지러운데도 곧 죽어도 아예 놓지는 못하는 자신이 참 한심스럽고 한심스러워서 또 눈 앞이 부옇다. 좋아해. 먼저 했어야 하는 말은 아무 데도 갈 곳 없이 몇 번을 삼켜져서 위 안을 따갑게 맴돌았다.
말 없이 섞이는 몸은 그 나름의 위안이 되었다. 눈 앞이 하얗게 튀는 쾌감. 다른 누구도 아닌 네 몸을 빌어서. 아니, 억지로 취해서. 네 아픈 듯 참는 소리가 조금은 나긋하게 풀어지는 것. 시트를 손 마디가 도드라지도록 쥐던 손 위에 모른 척 깍지 껴 잡는 손을 할퀴지 않는 것. 그런 것이 그나마 조금 덜 쓰렸다. 목덜미에 길게 키스하며 카이의 몸 안에 자신을 쏟아 내었다. 달뜬 열이 가라앉고, 다시금 눈물샘 안이 콱 메워졌다. 이제 진짜 놓아야 해. 이를 악물고 참았다. 매정한 척, 볼일이 전부 끝난 척 몸을 거두고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했다. 뭐라 말을 할까 했다. 한숨이 꾸역꾸역 침묵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고, 말을 하려던 마음은 전부 흩어지고 없었다. 그냥, 그냥 나설 것이다. 저 문을 나서서, 그래서 두 번 다시는 마주할 일이 없도록.
"미와."
그러지 마, 제발.
이런 때에 이름을 부른다. 평소와 같이 사랑스러운 높낮이를 고스란히 담아서. 거기에 또 고개가 돌아갈 뻔 했다. 돌아 볼 뻔 했다. 다만 멎어 있자니 맨발로 걸어 오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돌아 보지 않을 것이었다. 그저 이렇게 나서서. 그렇게 영영.
카이는 굳이 고개를 돌리려 하지 않았다. 어깨를 잡아 돌리는 일도 없었다. 그저 뒤에 가만히 선 채로 손을 뻗었다. 뺨에 가볍게 닿는 손가락. 천천히 손 끝을 적시는 액체를 훔치듯 스치는 움직임. 그리고 그렇게 서서 나즉하게 한 번 더, 이름을 부른다. 아까보다 잦아든 소리. 그 고저에 웅크린 한숨. 미와. 돌아보지 않으려 했다. 잡아 끄는 목소리. 이름. 아마 지금 자신은 눈 뜨고 보기 힘들게 흉한 모습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고개를 느리게 돌렸다. 죗값을 받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부연 시야에 맺히는 사람. 다시금 느리게 뻗어 오는 손. 놓아야 했는데. 턱 끝에 맺혔다가 뚝 낙하하는 물기가 낯설기만 했다. 미와는 조용하게 입술 새로 새어 나가는 말을 그냥 두었다. 카이. 여즉까지도 흐린 시야 안에 자리한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그 역시 그대로 두었다. 카이. 한 번 더 작게 읊조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