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가 길게 늘어졌다. 퍼붓는 비가 써늘하게 투구를 두드리고, 슬슬 해가 질 시각이 다가왔다. 카이는 초조해졌다. 해가 지면 적군은 퇴각을 우선시해서 움직일 것이었고, 끝을 무리해서 쫓다가는 오히려 적진 한 가운데에 휘말려 참살당하는 수가 있었다. 더 이상 길게 끌 이유가 없는 전투였다. 부상자들이 죽어나갈 것이었고, 용들은 지칠 것이었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마무리하는 것에는 한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 카이가 이제껏 써 오던 방법이기도 했다. 용이 엉망으로 지칠 때까지 폭주하고, 짓밟고, 근방 모든 것을 태운 후 직접 숨을 끊어서 그 시체의 무게를 이용해 섬멸전을 펼치는 것이다. 이전이었다면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가 멎기를 기다리지도, 후열을 가다듬을 시간도 들이지 않고 기습적인 섬멸을 목표로 행동했을 것이었다. 실제로, 카이와 용이 전진할때마다 적군의 대다수가 겁에 질려 반경 거리 밖으로 달아나기에 바빴다. 그러나 카이는 주저했다.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겁내며 물러서는 적 위로 단번에 날아올라 뭉개지 않았다. 뱃가죽에 창이 찔리면 그 땐 끝이었다. 미와는 살아 오라고 했었다. 살아 데려오라는 말일 터였다. 이 이상 헛된 희생을 보고싶지 않은 브리더의 마음이 울화가 되었던 것이 분명했다. 목에 걸린 손가락 두 마디만한 쇠피리가 차갑게 목을 스쳤다. 카이는 대신 장창을 휘둘러 후열에 보이게 했다. 일사분란하게 병사들이 물러서 열을 맞추는 것이 등 뒤로 느껴졌다. 후방 전열을 가다듬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멈칫거리고 물러서던 적군이 일제히 카이 근처로 몰려들었다. 그 때를 노려 피리를 길게 불자, 카이 근방에 둥그런 모양으로 시체의 원이 생겼다.
살 타는 고약한 냄새가 빗 속을 메우고, 화염 연기가 걷히기를 기다린 듯 화살세례가 날아들었다. 비늘에는 박히지 않는 작고 날랜 촉. 용기사를 노리는 것이다. 용이 눈치 채고 꼬리를 휘둘러 대부분의 화살이 막혔지만, 몇 개는 기어코 카이 근처까지 날아들었다. 용이 뿜는 화염을 지나 달궈지도록 설계된, 말 그대로 카이를 사냥하기 위한 기름을 먹인 촉. 불을 뛰어넘는 고온을 지나서도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화살은 화살대조차 속이 빈 철로 이루어져 있었다. 최대한 날카롭고 작게 만들어진 쇠촉은 용이 내뿜는 보통 화염 이상의 고온을 지나 경갑옷정도는 가볍게 뚫을 정도로 달궈진 채였다. 가벼운 갑옷 너머로 끔찍한 열기가 살을 지졌다. 살의가 곧 팔과 옆구리에 남는 고통이 되고, 이가 악물어졌다.
허리를 숙이면 안 되었다. 그러면 용이 바로 타겟이 된다. 몸을 숙이는 용기사는 곧 용을 내려놓는 용기사였고, 뒤를 돌아보는 장수는 제 군대를 믿지 못하는 이였다. 다행히도 장창을 든 쪽 팔은 멀쩡했다. 카이는 창을 놓지도, 뒤를 돌아 후열을 확인하지도 않았다. 어금니에 묵직한 고통이 느껴지도록 콱 사려물고는 허리를 세워 앞을 보았을 뿐이었다. 용이 목을 숙이고 꼬리를 휘둘러 바닥을 내리쳤다. 일순 바닥이 쾅 울리는 충격에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나오고, 그마저도 용이 내지르는 포효에 묻히고 말았다. 궁술부대가 멈칫하고 물러서는 것이 보였다. 그 먼 거리에서도 카이의 살의는 뚜렷했다.
대륙을 뒤흔드는 그 소문은 거짓이 아니었다. 절대전쟁을 선포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이가 눈 앞에 존재하는 저 남자였다. 시퍼렇게 일렁이는 것은 부상을 입은 분노가 아니었다. 용이 한 발을 내딛고, 무게를 실은 그 울림이 다시금 땅을 흔들었다. 궁술부대는 다시금 활에 화살을 매겼고, 개중 몇은 손을 떨어 화살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 혼란을 틈타 쇠피리 소리가 빗속을 날카롭게 찢었다. 아까와 같은 식으로 화살이 날아와도 개의치 않겠다는 전의가 똑똑히 보였다. 아까와는 달리 끊임없이 긴 소리가 공기를 파열하고 멀리도 가고, 용이 그 아가리를 벌려 불을 뿜었다. 끄트머리가 시퍼런 화염이 피리 소리를 따라 길게 넘실거렸다. 카이를 상대로 함을 알면서도 겁없이 최전선에 선 댓가는 참혹했다. 다시금 가시돋친 꼬리가 새카맣게 그을린 시체와 함께 전열 자체를 뒤로밀어내고, 카이는 장창을 앞으로 겨누고 크게 한 번 저었다. 전열을 다듬은 후열이 일제히 발을 맞추어 빠르게 전진하는 소리가 빗소리를 덮었다. 카이는 그 동안에도 똑바르게 앞을 보고 있는 채였다. 그 모든 것은 단순한 전략이나 생존법이 아니라 어떠한 예의이기도 했다. 큰 잘잘못이나 대의 없이 시대에 휩쓸려 죽어 나가는 젊은 청년들을 마주하는, 일종의 격식인 것이다. 승리의 함성이 빗속을 뚫고, 카이는 창을 높이 들었다. 종전까지 딱 한 걸음. 거기에도 존재해야 할 소리가 곧 이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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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은 생각보다도 심각했다. 비가 멎고, 그을음이 남은 전장터에 천막을 펴고 불을 지핀 후에야 화살을 뽑아 낼 수가 있었다. 싸한 소독약조차 서늘하게 느껴졌다. 일시의 고열에 의해 촉 근처로 눌어붙은 피부는 촉이 떨어져 나가자 곧 벌겋게 벌어져 피를 흘렸고, 그 근처엔 우그러든 흉이 남았다.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왼팔과 왼쪽 옆구리가 전부라 차라리 감사했다. 작고 가벼운 만큼 깊게 관통하지는 못하는 화살인 것이 그마나 다행이었다. 창을 다루는 데에도 문제가 없었고, 저린 아픔만 감내한다면 용의 사슬이나 피리를 다루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았다. 구멍이 난 경갑은 수리를 맡기고, 다른 갑옷을 꺼내 손질을 했다.
그 모든 일을 마치고 할 일이라곤 퇴각 뿐이었다. 현재 남은 전투는 남쪽 국경과 북서쪽 진지 뿐이었고, 북서쪽 진지는 이미 제 3 용기사단과 제 5 기마단이 출격한 채였다. 다른 기사단들은 남은 국경과 주요 수도 및 항구를 방어 중이었다. 해가 뜰 즈음엔 제 7 용기사단이 도착할 것이었고, 철갑용들을 필두로 북쪽 국경을 지키는 것이 그들의 남은 임무였다. 해가 뜨면 곧 짧은 휴식이 내려질 것이었다. 카이는 부상에서 끓는 열에 멍한 머리로 잠시 생각했다.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