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매끄럽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싶어서 욕심을 부렸더니, 이번 화가 좀 밋밋해진 것 같다......슬프다....그래도 트릭스러운 뭔가는 원한만큼 쓴 것 같아서 그 부분에선 대만족.
깊이 잠들지 못했어도, 아침은 꾸역꾸역 찾아왔다.
이사쿠는 기묘하게 날이 선 정신을 억지로 달래 가며 집을 나섰다. 계절이 바뀌어 감기 환자가 많아질 시기인데다가, 이전 지진 탓에 비축해 둔 약초의 양이 슬슬 위태로웠다. 등에 망태기를 지고 산을 오르는 발걸음이 늘어졌다. 평소보다도 오랜 시간을 들여 산에 오르자 근처 밭뙈기에 모여 앉은 아낙 둘이 보였다. 지진 때 밭에 박힌 돌들을 추리던 중인지, 소쿠리에 주먹만 한 돌들이 가득했다. 이사쿠는 반갑게 말을 걸려다가 뚝 멎었다. 순간 등줄기에 식은땀이 솟았다. 이사쿠는 신을 벗어들고 조용히 나무 뒤에 숨었다. 심장을 혀에 올려둔 듯, 심장 소리가 이를 뒤흔들 정도로 컸다.
"촌장님이랑 노인네들만 모여서 회의했다 하드만."
"회의는 무신 회의. 일전에 거 다 같이 책 읽고 하지 않았나."
대답하는 아낙도, 말을 거는 아낙도 집에 어린 아들이라곤 없어 제법 덤덤해 보였다. 그럼에도 그 표정에는 어딘가 탐탁지 않은 듯, 묘한 주름이 그어져 있었다. 이사쿠는 그 깊은 주름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벌써 말이 오갔구나 하는 생각에 손이 주책 맞게 덜덜 떨렸다. 입안이 바짝 말랐지만, 그를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이사쿠는 눈을 감았다. 아낙들의 말소리가 한층 더 또렷하게 들렸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누구네 집 아들내미 데려다 써야 하는가 그걸로 회의했다카대."
"아 거 그런 중요한 거는 마을 사람 죄 불러놓고 얘기해야 쓰지 않나."
"이 사람아, 생각을 해 보소. 어린 아들 있는 집 부모면은 그 회의 깽판 안 놓겄나?"
"그거야 그렇다마는는, 영 마음이 불편하네. 그래가 누구네 집 아들이 간답디까?"
"그것이.....아무래도 다나카네 집 아들이 될 성 싶은데."
"인제 겨우 열살 먹은 애를?"
"아, 그 집 애가 좀 곱나. 누가 봐도 기집앤가 할 정도로 이쁘지. 거기다가 다나카네 집은 애들이 이미 많아서 부모 피눈물 덜 나겠다 싶어서 그런다대. 다나카네 집은 또 이 마을에 산 지 그렇게 오래지가 않으니까...우리마냥 연고도 없고...."
그렇대두 그 어린 것 데려다가, 하면서 중얼대는 아낙의 눈가는 제법 시뻘겋게 짓물러 있었다. 그 아낙을 가만 보던 다른 여인이 주위를 슬슬 살핀다 하더니 말을 꺼냈다.
"연고 없는 집 사람이면은, 다른 사람도 하나 있지 뭐야."
"무슨 말이소."
"아 그, 의원 꼬마도 갓 열다섯 먹질 않았나 그래. 부모님 여의고 친척도 없으니 연고도 없고, 뒷바라지할 식구도 없으니 영 혼자질 않아. 게다가 그 애도 퍽 곱고."
"그런 소리 마소. 연고가 없긴 무얼! 그 댁네 애 앓아누웠을 적에 누가 봐줬습디까? 마을에 의원이라곤 고거 하난데, 그 애 없는데 중한 환자라도 나면 언제 옆 마을까지 간다고 그런 소리를 다 한답니까?"
"나야 그냥 하는 말이지, 그리 성낼 것 있나. 자기나 나나 차피 아들 없는 건 같음서 무얼 그리 화를 박박 내고 그런가. 그게 말이지, 다나카네가 영 심상치가 않아서 하는 소리야 내가. 그이네 집이 그렇게 못살구 가난해도 딱 하나 중한 물건이 있는데, 그 조상 적부터 내려왔다던 부채가 하나 있다대. 끝에 옥두 매달고 부채 안에는 금칠해서 그림도 그리고 해서 귀한 건데, 글쎄 촌장이 그걸 품 안에 넣고 댕기는 걸 보았다구 우리 남편이 그러길래 그러지."
"허이고, 설마 뇌물 발라다가 아들 살린 건감?"
다른 아낙이 둥그렇게 눈을 부릅뜨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여인이 손사래를 치며 쉬쉬 하자 그제야 목소리를 낮춘 아낙은 손까지 파들파들 떨면서 말을 이었다.
"아니 그러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래. 그럴 거면 회의는 뭣 하러 하구 그런담. 그러면은 이시카와네 아들이나 야마노네 아들은 진즉 살았네. 그 집들은 애초에 떵떵대고 잘 살지 않았습디까."
"나야 모르지. 촌장님이랑 노인네들이 알아서 결정했다구 하는데 우리가 뭐라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힐 거, 안 그런가?"
나한텐
아무것도
남은게
없는데
그 생각은 곧 발을 움직였다. 다음 순간, 이사쿠는 뛰기 시작했다. 손에 콱 쥔 신이 살을 파고들어도, 버선 아래 걸리는 돌이 날카로워도, 아픈 줄도 모르고 소리를 죽인 채 뛰었다. 그렇게 숨도 쉬지 않고 산에서 내려오자, 그제야 숨이 트였다. 크게 숨을 들이쉬는데, 눈물이 왈칵 솟았다. 흰 버선발이 흙이며 피로 물든 것이 서러웠다. 그렇게 더러워진 버선발에 툭툭 떨어지는 눈물이 한층 더 섧었다. 뜨끈하게 젖는 버선 속 생채기가 따가운 줄도 모르고, 이사쿠는 결국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혼자 울었다.
신을 도로 신고, 벌겋게 짓무른 얼굴을 쓱쓱 소매로 닦고 다시 집으로 향하는 걸음이 무거웠다. 납으로 땜을 해 넣은 듯 처지는 걸음이 못내 미웠다. 길어지기 시작한 그림자를 가만 보며 걷던 이사쿠는 생각했다.
마을을 빠져나가서 도망가야 하는걸까. 그럼 먼저 짐을 꾸리고, 돈을 챙기고 아무도 몰래 마을을 나가면 되는 걸까. 그러면 어디로 가야 하는 거지. 그런데 내가 도망치면 다른 사람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보다 이 일은 정말 쓸모가 있는 걸까. 아니, 그 이전에 정말 나로 결정된 게 맞을까.
곰곰이 생각하며 걷던 이사쿠는 그제야 눈치챘다. 드문드문 지나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느리게 와 닿았다. 평소처럼 친근하고 푸근한 시선은 온데간데없고 측은하다는 듯, 안쓰럽다는 듯 가라앉은 눈길들만 가득했다. 개중에는 눈을 채 맞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이사쿠는 고개를 푹 숙이고 뛰었다. 집으로 가자. 집으로 가서 생각하자. 짐을 챙기던, 울던, 혼자 문을 걸어 잠그고 하자.
그렇게 뛰어 도착한 집엔 손님이 있었다.
아낙들이 말하던 다나카네 어린 아들이었다. 감기에 걸린 듯, 벌건 얼굴엔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 있었다. 다가가서 열을 재자 손바닥이 후끈 달아오를 정도로 뜨거웠다.
"어머니는?"
"장에 가셨어요. 오늘 팔지 않으면 채소가 무른대요."
이사쿠는 어린 애를 안에 들였다. 손바닥에 끈적하게 고인 식은땀을 바지춤에 닦고 이부자리를 펴 아이를 눕혔다. 얼마 남지 않은 약초를 꺼내 약을 끓이는 와중에도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쯤이면 장이 파할 시간인데, 아이 어머니는 기별도 없다는 것이 섬뜩했다. 계절이 바뀌어서, 그래서 감기에 걸린 것뿐이야. 한참을 머릿속에 그 문장만 되뇌던 결국 이사쿠는 입을 열었다.
"....어쩌다가 감기에 걸렸는지 말해줄 수 있니?"
아이가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어머니가 제가 싫은가 봐요. 어젯밤에 그렇게 울면서 빌어도 안에 들여주지 않으셨어요. 추워서 기침을 하는데도 이게 다 저 때문이래요. 제가 뭔가 크게 잘못을 했나 봐요."
아아.
이사쿠는 약을 끓이던 부채를 놓았다. 평생을 같이 산 마을 사람들은 저를 너무 잘 알았다. 남의 상처 동여매 주고 약 끓여가며 산 인생의 가장 무른 부분을 어떻게 파헤쳐야 할지, 그 사람들은 너무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사쿠는 속으로 날카로운 오열을 집어삼켰다. 아이는 속도 모르고 뭐라 종알대고 있었지만, 이사쿠는 듣지 못했다.
밖이 벌써 시커멓게 저물기 시작했다. 이사쿠는 벌컥 밖으로 나갔다. 미친 사람처럼 주위를 휘휘 둘러보자, 마을 군데군데에 벌겋게 타오르는 횃불이 보였다. 두 군데는 유독 빛이 밝았다. 그 두 군데는 마을을 나갈 수 있는 출구였다. 땅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일전에 다 같이 모여 본 산신의 그림이 머릿속에 꽉 찼다. 그 그림은 곧 덩실대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피칠을 한 듯 시뻘건 입이 크게 벌려졌다 닫히는 모습이 눈앞에 어른댔다. 이사쿠는 고요히 마루에 앉아 움직이질 못했다. 마치 주박에 걸린 듯, 몸의 한 군데도 마음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세게 닫긴 문 너머에서 어린 애가 칭얼거리는 게 들렸지만, 이사쿠는 굳은 그대로였다.
밤이 깊으려고 하고 있었다. 그 어둠이 손가락까지 물들일 무렵, 야트막한 언덕 너머로 너울대는 횃불 몇 개가 보였다. 이사쿠는 그제야 마을이 쥐죽은 듯 고요함을 알았다. 한창 저녁 때였는데도, 밥 짓는 연기 하나 올라오질 않는 모양에 이사쿠는 헛웃음을 지었다.
어느새 방 안의 아이는 조용해져 있었다. 약을 마시고 잠이 든 듯, 색색대는 숨소리가 가끔 장지문을 넘어왔다. 이사쿠는 이 무거운 침묵이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부터 이 침묵은 이사쿠 근처에 항시 숨어 있었다. 그때처럼 덜덜 떠는 손가락이 제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연한 어둠이 깔려 파르랗게 보이는 그 손가락은 꼭 죽은 사람 손 같았다. 이사쿠는 소리 내서 웃었다. 불안한 웃음소리는 공기 중에 채 퍼지지도 못하고 사그라졌다. 밤은 시커먼 칼날을 목에 들이대면서 깊어 갔다. 이사쿠는 시린 목을 가리지도 못하고, 가만 그 자리에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