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마다 너풀대는 대나무 장식과 오색 탄자쿠가 싫어도 눈에 띄었다. 엊그제가 연초같은데, 벌써 일 년의 반 하고도 조금 더 돌아 칠석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매미 울기 시작 할 때에도 감흥이라곤 없던 마음이 괜시리 불안하게 울렁거렸다. 또 시간이 흐른 것이다. 또. 카이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늘이 흐리다. 올해 칠석에는 비가 올 모양이었다.
길을 걷고 있노라면 어쩔 수 없이 모였다 흩어지는 이목들. 카이는 등 뒤로 소근거리고 멀어지는 소리들을 무심하게 흘려 보냈다. 학창 시절부터 서킷 우승자이자 수많은 대회를 석권한 파이터로 유명세를 치른 지 꽤 되었지만, 프로가 된 이후에는 역시 그 정도가 달랐다. 올해는 해외 대회에도 출정이 잦았거니와 승률 또한 눈에 띄게 높았다. 덕택에 자연히 이름이 알려지고, 어느덧 큰 길가의 스크린에 자신의 경기 상황이 비춰지는 일도 있었다. 카이는 저도 모르게 길가에 늘어선 대나무 장식들을 눈으로 좇았다. 괜한 불안함은 지난 경기로부터의 스트레스일까. 그도 아니면 해외 출정의 여독일까. 바람에 휘청일 듯 가느다란 대나무 장식들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듯 하여 괜히 걸음을 빨리 했다. 행선지는 정해져 있었다.
한산한 카페 안, 카이는 들어서기가 무섭게 가장 으슥한 자리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카페 내엔 조용한 피아노 음악과 몇몇 일행이 소곤거리고 이야기를 하는 소리 , 그리고 커피를 내리는 김이 뿜어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카이는 그렇게 앉아 가만히 흐린 하늘을 바라보았다. 덱을 꺼내어 보는 일이나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는 일도 없이, 그냥 커피 잔을 묵묵히 비우며 그렇게 앉았을 뿐이다.
동시에 기를 쓰고 피해 온 여유가 급작스럽게 찾아 들었다. 그렇게 머릿속에 빈 공간이 생기기가 무섭게 기억이 탁 터져 밀려 들어온다. 그간 억지로라도 피곤하게 지내 온 것을 비웃듯, 일시에 몰아치는 것들은 먹먹하게 머릿속에 파도친다. 눈을 여러 번 감았다가 떠 보아도 잔재할 뿐인 감정. 모래 찌꺼기처럼 알알이 배기고야 마는. 커피를 한 모금 더 머금어 보았다. 알고 있다. 혼자 앉아 내리 몇 잔을 마신대도, 더 이상 카페로 곧장 데리러 오는 사람은 없다. 자신이 어느 카페에서 오후 시간을 죽이곤 하는지 외우고 있는 사람도 더는 없다. 사라져서가 아니다. 도망쳤기 때문이다. 다름아닌 스스로가.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 파이터 제안을 받은 건 예상 대로의 진로였다. 그는 조금 아쉬워 헀던 것도 같다. 같이 대학 생활을 할 수도 있었던 것에 기대를 했던 모양인지, 조금 처진 어깨로 배시시 웃어 보이던 모습이 잡힐 듯 어른거렸다. 카이는 조용히 창 밖을 바라보았다. 대학. 대학에 갈 수는 있었다. 애초에 성적은 나쁘지 않았고, 흥미 있는 과가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프로 파이터가 되기를 택했다.
도망치기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대학 4년간을 더 그와 있을 자신이 없었다. 신경 끄트머리가 탄 내가 나도록 그슬린 상태였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에는 감정에 목이 메 숨이 끊길 것만 같던 때였다. 그렇다고 해서 해가 갈 때마다 무거워진 감정을 털어놓기엔 겁이 앞섰다. 잃느니 버리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망을 택했다.장소도 알리지 않고 이사를 하고, 휴대폰은 일부러 고장난 척 바꾸었다. 그런 비열한 속내도 모른 채, 프로가 되겠다는 말에 웃는 낯으로 어깨를 두드려 주던 이. 그는 이제 어딘가에서 한 명의 사회인으로 일을 시작했을 터였다. 어떻게 사는지 보고 싶지 않다면 그건 그것 나름의 훌륭한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자신에겐 자격이 없었다.
카이는 품 안에서 해진 종이 봉투 한 장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퍽 오래 된 편지인지, 희던 색이 살짝 바래고 모퉁이가 살짝 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열리거나 튿어진 흔적은 없는, 기묘한 편지가 한 통.
이삼 년 전의 일이다. 죄 지은 것 마냥, 아무도 없을 새벽 시간을 골라 택시를 타고 두어 시간을 달려 원래 살던 곳에 도착했다. 스스로 달아난 주제에 시시때때로 치미는 향수를 이기지 못함에서 그런 짓을 했다. 그래놓고는 들를 곳이 없어 예전에 살던 집 근처를 조금 거닐었을 뿐이다. 그리고 이전에 살던 집에 들러 우편함을 보았다. 별반 의미 없는 행동이었다. 오랜 습관 그대로,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우편함을 들추었을 뿐이었다.
아직 아무도 입주하지 않은 우편함에 소복하게 쌓인 편지. 파스텔 톤 그림이 그려진 엽서. 모두 같은 수취인과 발신인을 가리키는 그 종이에 지독하게 배인 쓴 물이 올라왔다. 홀로 거기 멀거니 서서 속을 꽉 채우는 쓴 물에 잠기기만 했다. 그리곤 딱 한 개를 집어서는 그 자리에서 다시금 도망쳤다. 오늘 이 날 까지도 차마 열어 보지 못한 편지는 시간이 갈수록 그 무게가 무거워질 뿐이었다. 품 안이 묵지근하게 아팠다. 일종의 증표인 셈이다. 스스로가 어떤 죄스러운 선택을 했는지, 상냥하기만 하던 호의를 어떤 삿된 감정으로 배반했는지. 결국 오늘도 읽어 볼 수 없었다. 겉봉에 씌인 이름자를 손가락 끝으로 훑는 것 만으로도 쓰린 감각이 그리움과 달게 섞여 스친다. 한숨을 길게 쉬고, 다시금 품 안에 갈무리해 넣는다. 식어빠진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은 혀가 타도록 쓸 뿐이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은 멀지 않다. 걸어 돌아가는 길에 찻집에 들러 갈린 원두를 한 봉 샀다. 칠석에 들르는 손님에게 주는 것인지, 탄자쿠 종이가 영수증과 함께 따라 돌아온다. 나이가 지긋한 여주인이 사람 좋은 미소와 함께 기어코 한 마디를 덧붙이고야 만다. 비가 오지 않아야 견우 직녀가 만날 텐데 말이에요. 그저 고개만 끄덕 하고는 가게를 나서려는데, 여주인이 부랴부랴 따라 나오더니 손에 펜을 쥐어준다. 아차 싶었다. 그제야 가게 앞 구석에 세워 놓은 대나무 장식이 눈에 띄었다. 이런 작은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인 모양인지,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카이는 머뭇대다가 펜을 받아 들었다. 대충 쓰는 척만 하곤 백지를 달아 두어도 모를 것이다. 수북하게 달린 탄자쿠를 일일히 읽어 보는 사람도 없거니와, 남의 소원을 관음하는 것은 일종의 무례이기도 했다. 카이는 쓰는 시늉만 하려던 펜을 고쳐 쥐었다. 소원. 바라는 것. 이런 것을 일일히 믿지는 않지만, 그래도 한 줄의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면….
품에 안아들고 가는 원두에서는 향긋한 향이 내내 풍겼다. 머릿속이 찡해지는 커피 향을 들이키며 흐린 채 막 지려는 저녁 놀을 흘겨 보았다. 스치고 지나가는 풍광일 뿐이다. 지난 날처럼. 지나 버린 것들처럼.
깜박이는 눈 앞이 흐릿했다. 해외 출정에서 돌아온 것이 불과 며칠 전이다. 아직도 여독이 남아 피로했다. 불규칙한 시차에 적응하기 위해서 수면제까지 처방받기 시작한 것 또한 얼마 전이다. 집에 가면 저녁을 먹고, 그리고는 곧바로 약을 먹고 잠들 예정이었다. 아이들이 무리지어 노는지, 여기저기 뛰는 소리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멀리 들렸다. 점차 가까워지는 뜀박질 소리. 내가 어릴 땐 어땠더라. 생각하려다가 말았다. 그의 기억은 그런 어린 시절에도 틈 없이 존재했으므로. 일일히 추억하고 괴로워하기엔 너무도 피곤했다. 카이는 잠깐 멈춰 눈을 꾹 감았다가 떠 보았다. 금세 시야가 돌아왔다. 동시에 뜀박질 소리가 등 바로 뒤까지 따라온다 싶더니, 어깨가 확 잡아 채인다.
“카이,”
헛숨이 목을 넘어갔다. 품 안에 안고 있던 원두 봉지가 바닥으로 툭 낙하했다. 동시에 심장이 뱃속 깊은 곳까지 쿵 떨어졌다. 잊은 적 없는 얼굴이 코 앞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년의 기간만큼 더 자란걸까. 기억하는 것 보다도 조금 더 높아진 어깨. 나이에 맞게 성숙해진 얼굴. 단정하게 다려진 양복 자락. 그런 차림을 하고 뛴 걸까. 숨을 몰아 쉬면서도 이쪽을 향하는 시선은 결코 돌리질 않는 것에 눈 앞이 뿌옇게 흐렸다. 어깨를 틀어쥔 손은 어느덧 단단하게 자라 있었다.
얻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도 아니면 깊은 한숨을 마주할 거라고도 생각했다. 무시. 경멸. 분노. 그런 것들을 동시에 보인대도 할 말이 없었다. 자신은 죄인이었다. 끝까지 이기적이기를 원한 사람이었다. 우편함에 소복하게 쌓인 편지를 보고 아픈 만큼 원망했다. 도망친 건 자신이면서, 만나러 와 주지 않는 이가 서러웠다. 상대가 자신과 같은 깊이로 마주보고 있지 않음을 알면서도, 겁내면서도, 그럼에도 섧었다. 전할 일 없는 마음을 혼자 부둥켜 안고는 그것이 상대가 아님을 한탄했다. 자신은, 그런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카이, 진짜로 카이다…”
끄트머리가 울먹거리는 소리에 작게 휘말리는 말은 경멸도, 분노도, 무시도 아니었다. 차라리 이런게 아팠다. 네 호의가, 변할 일 없는 우정이 지독하게 아프고 또 황홀했다. 그래서 다시금 내치려고 했다. 습관에 가까운 거부. 하지만 손을 들기도 전에 성큼 너른 품이 다가왔다. 숨이 답답하도록 꽉 끌어안는 팔이 등을 감고, 고개가 어깨에 기대듯 숙여졌다. 품 안에 넣어둔 편지가 버석거리고 맞닿았다. 심장이 있을 곳. 그렇게 생각하니 갑작스레 심박수가 널을 뛰었다. 머릿속이 새하얬다. 다시 달아나야 하나. 아니면, 그도 아니면 아주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기적에 걸고 다시금 그 목 메는 생활을 이어나가야 할까.
그런 생각은 오래 가질 못했다. 고개가 들린다 싶더니, 높은 체온이 입술에 와 닿았다. 짧게 닿았다가 떨어지는 입술은 거짓말 같았다. 사실임을 증명하듯, 다시금 입술을 짧게 눌렀다가 떼는 데엔 간절함마저 엿보였다.
뭐라 말도 하지 못했다. 내치지도 못했다. 뜨끈하게 젖어 오는 어깨. 얼굴을 보이기 싫다는 듯, 숙인 고개. 아주 작게 몇 번이고 속살거리는 물기 섞인 소리. 보고 싶었어. 정말로, 보고 싶었어. 네가 보고 싶었어. 이길 수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동시에 이길 수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냥 그 등에 팔을 마주 둘렀다. 한숨과 함께 섞어서 작게 대답했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머릿속으로도 몇 번이고 되뇌었다. 보고 싶었어. 그리웠어. 네가. 대답하듯 힘을 주어 끌어안는 사람은 적어도 하룻밤의 기적만은 아닐 터였다. 흐리던 하늘 끄트머리가 맑게 갠 어둠을 몰고 흘렀다. 올해 칠석은,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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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와가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