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게 질린 몸뚱이를 해서는 비틀거리고 걸어 나온 카이는 시선 한 번을 맞추지 않았다.
머리카락
끝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속옷과 헐렁한 티셔츠 하나를 걸치고는 그대로 침대 끄트머리에 아슬하게 걸터 앉았을 뿐이었다. 잠깐 조각잠이 들었다가 깬 미와는 퍼석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감기 걸릴라. 아까와 같이 모호한 빛을 등진 채 앉은 카이. 그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았다. 카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는 가만히 그대로 미와 곁에 누웠다. 척척하게
젖은 머리칼이 금세 옮기는 물기.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도 소름이 쭉 돋도록 차가운 이마. 괜히 더럭 겁이 났다. 산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믿도록 차갑고 투명하게만 보이는 채, 카이는 옆에 살짝 이마를 대고 웅크려 누운 채였다. 아직 잠들지 않았음을 잘 알면서도 그 이상 말을 걸 수 없었다. 흔들리고
있을 것이었다. 속 안에 일렁거리고 몇 번이고 뒤엎어지는 파문이 일 것이었다. 아주 먼 기억 어딘가에 존재하는 어리던 카이가 그러했듯. 미와는 막연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 번을 되새겼다. 그럼 여기 있는 것이 옳지 않은가 하고. 아주 가끔이라도, 그렇게 카이가 흔들리고 바람 맞는 날이 있다면 응당 그 그림자 지는 자리에는 자신이 서 있음이 옳지 않은가 하고. 그렇게 생각하면 괜히 미안하고 짠했다. 이 몇 년을 핑계로 나는 도망친 게 아닐까. 언제든 기대라고 호언장담 하던 어린 시절을 까맣게 잊고는 등 돌린 건 곧 자신이 아닐까.
꼬리도, 머리도 없이 빙빙 맴도는 생각 위에 솜털처럼 내려앉는 숨소리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잠이 든 듯, 고르고 고요한 소리가 박을 맞추어 들렸다.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이 끝끝내 걱정이 되고, 영양가 없이 제 꼬리잡기에만 바쁜 생각은 곧 수면 아래로 잠겼다.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앞으로도
종종 듣고 싶은 소리이노라고, 그렇게 가만히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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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새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피곤하기는
했을 터였다. 그럼에도
알약 없이 잠들 수 있었다는 것이 못내 놀라웠다. 이유는 굳이 캐묻지 않아도 쉬웠다. 굳이 끌어안거나 손을 잡지 않아도 지척에서 옮아들어오는 온기. 나즉한 숨소리. 언젠가 밤 늦게까지 함께 어울려 놀고는 바로 이 침대에서 잠든 네 곁을 밤새 뜬 눈으로 보냈던 새벽이 씁쓸하고 쓸쓸한 무게로 눈꺼풀을 내리누르고, 꿈에서는
단 한번도 잡아 본 적 없는 네 손을 잡았었다. 스치듯, 혹은 간혹 어쩌다가 장난치듯 잡았다 놓곤 하던 따스함이 아닌 확실하게 깍지 껴 잡은 단단한 손가락. 잠에 취한 머리로도 꿈이라고 알았고, 그 부분이 제일 끔찍했다. 억지로 너와 잘 수는 있었어도 다정하게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이젠 더더욱 그러지 못하겠지. 그런 생각이 꿈의 막을 처연하게 내리고, 눈이 같은 속도로 느리게 뜨였다.
그리고는
마주해야만 했다. 눈이 부시도록 청명한 날씨. 창에서부터
담뿍 쏟아져내리는 맑은 햇살.
그 환함 아래에 텅 빈 자리.
괜히 한 번 손바닥으로 쓸어 보았다. 온기조차
남지 않은 시트 위. 침대 머리맡에 곱게 개켜 둔 넥타이.
네 팔을 묶는 데에, 추억을 잘라 버리는 데에 썼던 넥타이. 카이는 느리게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듯, 혹은 부정하거나 잊으려는 듯 가만히 존재하기만 했다. 날이 밝으면 어쩌려고 했더라. 유령답게
안개 속으로 녹아서 사라지려고 했던가. 혹은 새벽을 길게, 길게 늘이고만 싶은 마음으로 쇠줄이라도 사러 가려고 했던가. 미와가 몰래 일어나 떠난 자리와 함께 조용히 떠나고 만 생각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 어떠한 소용도 없는 생각이기도 했다. 카이는 손가락을 길게 뻗어 얼굴을 가렸다.
보는 이 없이도 수치스러웠고 아는 이 없이도 섧었다. 자신이 깨뜨린 것이었고, 거기에 베인 것 또한 자신이다. 남은 것은 피흘리다 죽는 일 뿐. 완연히 홀로. 완벽한 혼자인 채로 그렇게 삶에의 기대를 꺼뜨리는 일이 남았을 뿐이었다. 손 끝에 면도날을 단 듯 섬찟하게 날카로왔다. 카이는 어금니를 꾹 사려 물었다.
익숙해져야만 했다. 앞으로는 더 아플 것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