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잠들고 없는 복도는 컴컴했다. 헤이다유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이며 자기 방으로 향했다. 곧 누울 수 있을 것이다. 힘든 하루의 끝을 되새길 틈도 없이, 베개에 머리를 대기가 무섭게 푹 잠이 들 것이다. 그런 기대를 하며 방 앞에 섰을 때엔 오히려 잠이 싹 달아나고 없었다. 잠든 산지로의 숨소리가 오르내리고, 헤이다유는 뜬 눈으로 오래도록 생각을 했다. 그 날, 그 새벽에 조용조용 걸어 자기 눈 앞을 지나던 덴시치를 떠올렸다. 핏기가 싹 빠진 흰 얼굴. 석양 같은 머리색도 새벽 어스름을 입어 연하게 흔들리고, 생기 없는 눈동자는 뒤가 비쳐 보일 것만 같았다. 손가락 대면 그대로 파스스 흩어지고 말 것 같은 안개. 새벽을 말 없이 비틀대며 지나는 유령. 등줄기에는 소름이 돋고, 손 안에는 식은땀이 고인다. 그럼에도 머릿속에는 강렬하게 남았다. 거기에는 묘한 미가 있었으므로. 새벽 모든 색에 스스럼 없이 녹아 든, 생사의 경계가 모호하게 뭉개진 덴시치의 모습은 선뜩하고도 보기가 좋았다.
그 광경에 현실감을 단번에 불어 넣는 붉은 색이 있었다.
가장자리가 갈색으로 말라붙기 시작한 핏자국. 수건 가득 번진 자국에서 익숙한 쇠 냄새가 풍겨 올라왔다. 정신이 번뜩 들었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그러쥐고 몸을 돌렸다. 억지로 잡아 벌린 침의 사이로 가득 새겨진 상처가 보였다. 허벅지. 옆구리. 복부. 골반뼈 바로 위. 하나같이 횡으로 길게 그어진 상처들은 깊지는 않았어도 그 수가 많았다. 개중 대다수는 최근에 생긴 것인지, 겨우 피딱지가 앉은 것도 몇 개나 되었다. 속에 이유 모를 욕지기가 치밀었다. 여기까지 치닫는 친우를 보고도 겨우 드는 생각이 곱다 따위인 자신이 역겨운지, 아니면 덴시치를 여기까지 몰고 온 살육이 몰아치는 이 시대가 역겨운지는 잘 알 수 없었다. 그 날 덴시치에게는 좀체 말을 붙일 수가 없었다. 그저 어깨를 얌전히 밀어 방에 도로 데려다 주고, 그리고 조용조용 자기 방에 돌아왔을 따름이다. 정신을 차렸을 적엔 손 안에 피가 축축한 수건이 있었다. 홀린 것만 같았다. 그 날 이후로 죽 그랬다. 새벽이 오면 돌연 잠에서 깼다. 아무도 없는 우물가를 홀로 걷는 날이 늘어갈수록, 피 묻은 수건이 버석하게 말라갈수록, 머릿속엔 그 새벽의 향취가 진하게 남았다. 잠이 절로 깨고, 목이 다 타는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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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두게 해야 한다는 생각 또한 했다.
상처가 늘 수록 덴시치의 몸도, 정신도 허물어짐이 분명했다. 그렇지만 헤이다유는 좀처럼 말을 걸 수가 없었다. 평소와 같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퉁명스럽고 새침한 태도. 그 날의 일이 헤이다유 혼자만의 꿈이었다고 생각하게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뒷덜미에 느린 시선이 와 박혔다. 덴시치의 시선이었다. 잊지 말라는 듯, 느리게 등까지 와 닿았다가 멀어지는 시선. 거기에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함부로 입을 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감히 끼어 들 문제가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질문이 있었다. 자신은 덴시치에게 무엇일까. 그리고 하나 더. 덴시치에게 자신은 어떤 존재일까.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맥이 쭉 빠졌다. 같은 위원회. 같은 학년. 그럼에도 가장 친한 친구는 못 된다. 덴시치 이름 뒤에 따라 나오는 제일 친한 친구의 이름은 자기 것이 아니다. 자기가 생각해도 사키치나 히코시로의 이름이 더 자연스럽다. 자신이 참견 할 자격이 있을까. 헤이다유는 스스로가 특별히 말재주가 있거나 상냥스럽지 않음을 알았다. 이런 일에 더 어울릴 법한 이름들이 몇 개나 있었다. 란타로, 히코시로, 쇼자에몽…….
어쩌면 화를 낼 수도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런 지극히 개인적인 치부에 가까운 일에 머리를 드미는 일은, 덴시치 자존심에 좀처럼 용납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려운 일이었다. 도망칠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지금처럼 존재하는 것 뿐이었다. 가벼운 농담. 늘 같은 태도. 이런 것이라도 위안이 될 수 있다면 좋을텐데. 그런 생각을 몰래 말아 쥐고, 수건 사이에 넣어 개켜 두곤 말을 건넨다.
가끔 저를 보는 덴시치의 시선이나, 퍼뜩 놀래 굳는 모습 따위를 보면 어줍잖은 희망이 생기기도 했다. 어쩌면 가장 친구는 되지 못해도, 가장 애틋한 이는 될 수 있지 않을까. 우스운 희망이었다. 자신이 보아도 비웃게만 되는 그런 희망. 거기까지 가고 나선 지치고야 말았다. 겨우 건넨 새 수건을 받아들지도 않는 손. 더 이상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늘 같은 간격으로 멀 텐데. 이 이상 허우적거리는 것은 사양이었다. 덴시치가 물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느냐고. 묻는다고 대답해 줄 것도 아니잖아. 그런 심술은 다른 말이 되었다. 네 일이고, 나랑은 상관 없잖아. 불퉁한 말을 뱉으면서 내심 기대했다. 그런 게 아니라고 잠깐이라고 부정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덴시치는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끝끝내 받아 들지 않는 수건. 방에 돌아와서는 분했다. 달빛만 조금 스민 방 안, 산지로는 키우는 곤충들이 대거 탈출했다는 말만 남기고 없었고 헤이다유는 드물게 혼자였다. 개인 서랍을 힘 주어 열자 갈색 얼룩이 크게 진 수건이 보였다. 손아귀 안에, 품 안에 꽉 틀어 쥐고 이를 악물었다. 딱딱하게 말라 희미한 피 냄새 너머로 옅은 향이 일렁거렸다. 이제야 알게 된, 또 앓게 된 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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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새벽에 깨고야 말았다. 헤이다유는 피로로 흐려진 정신을 억지로 깨웠다. 이렇게 깨는 날이면 우물가까지 짧은 산책을 하고 돌아와 자고는 했다. 부질 없는 일임에도, 금세 든 버릇은 그만큼 금방 지워지지는 않았다. 흰 침의 자락이 다리 사이를 사박대고 스친다. 모두 잠든 복도는 을씨년스럽도록 고요하고, 새 우는 소리가 아주 멀리서 들린다. 공기마저 차분한 시각이다. 우물가에 가서는 차갑고 맑은 물에 손을 씻고, 다시 방으로 돌아간다. 한 동이 퍼 올린 물이 일렁인다. 물에 가만 담궈 둔 손가락은 금세 하얗게 질려가고, 색에 맞춰 체온이 천천히 떨어진다. 영양가 없는 상념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찰나였다.
숨 죽인 발걸음이 이 쪽으로 향했다. 반사적으로 고개가 휙 돌아간다. 아직 졸음이 남아 있던 머릿속이 퍼뜩 깬다. 그 날에 그랬던 것처럼, 핏기 가신 창백한 얼굴. 연하게 남은 머리칼의 색. 등 뒤에 감춘 것은 무엇인지 보지 않아도 알았다. 여기까지 확 풍기는 피 냄새. 눈이, 맞았다.
빠른 속도로 돌려지는 고개. 죽이던 발소리도 개의치 않고, 속도를 높여 달음질치는 등. 그 뒤에 머리카락과 같은 박자로 너울대는 붉은 수건. 정말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기겁해서 도망치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그 뒤를 따라 뛰었다. 덴시치는 빨랐지만, 일순 비틀거리고 멈추었다. 벽을 짚고 기대는 새하얀 손. 그 새 말랐을까. 마디가 눈에 띄도록 튀어나온 손가락은 힘이 유달리 없어 보였다. 어지러운 듯 했다. 고개가 푹 꺾인다. 그럼에도 피가 얼룩진 수건은 꽉 쥐고 놓지를 않았다. 비칠거리다가 꺾이려는 무릎. 헤이다유는 저도 모르게 그 팔을 확 끌어 당겼다. 품 안으로 가벼운 소리가 나면서 확실한 무게가 전해진다. 빠져 나가려는 듯, 팔에 힘을 주다가 결국엔 움직임이 잦아 든다. 희미하게 들리는 울음 소리. 이를 악문 듯, 겨우 잇새로 번져 나오는 소리에 헤이다유는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렸다. 손가락 끝에 감기는 머리카락을 한참 쓸어 내리며 몇 번이고 속삭였다. 괜찮아. 괜찮아. 덴시치, 괜찮아.
곧이어 울음이 멎고, 품 안에 숨긴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싫다는 듯, 피하는 뺨을 잡고 지긋이 바라보았다. 울음기가 남은 눈가. 처연하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그 힘듬을 모를 수도 없었다. 가여운 만큼 곱다. 온갖 감정으로 일그러진 단정한 얼굴을 가만 보던 헤이다유는 잠시 머뭇대던 그대로 입술을 내렸다. 남은 눈물 맛이 나는 입술은 달지는 않았지만 부드러웠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에 점차 힘이 빠지고, 품 안에 딱 맞게 굽어진다. 유령처럼 새벽을 거닐던 너를 대신하던 날은 오늘로 끝이 나려는 모양이었다. 이젠 새벽에 일 없이 깨지 않을 것이었다. 앞으로는 같은 시각에 함께 잠들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