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는 모른다. 본디 반이 달라서 자주 마주치지는 못한다. 위원회 활동을 제외하면 지척에 있을 일도 좀체 없다. 그럼에도 가끔 시선이 머물렀다. 부쩍 자란 키. 성큼 긴 머리카락. 어딘가 다른 곳을 응시하면서 웃거나 말하거나 그도 아니면 무표정으로 생각을 하는 것을 보았다. 마주치지는 않는 시선. 편했다. 당황하거나 놀랄 일도 없이 흘긋 바라볼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편했고 또 허했다. 하루의 끝에, 제일 늦은 시간에 목욕물에 들어가며 잠깐 생각하고는 했다. 오늘 보았던 헤이다유의 뒷모습 혹은 옆얼굴. 매일 조금씩 더 길어지는 목욕 시간.
헤이다유는 밝았다. 아니, 하반 학생들 거의가 밝은 편이었다.
곧 다가올 전쟁이나 살인의 그림자 따위는 머물 틈도 없다는 듯, 그렇게 활기차고 왁자했다. 위원회실에서도 그 반짝임은 좀처럼 떠나질 않았다. 자신만 있을 적엔 쭈삣대고 어려워 몸을 꼬던 후배들도 헤이다유의 얼굴을 보면 방긋 웃었다. 부럽지 않느냐고 하면 거짓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아직까지도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매일 마주하는 것이 사람 죽이는 법이었고, 살아 남는 법이었다. 수업부터 위원회 활동까지 하나도 빠짐 없이 살의와 맞닿아 있는데, 그런데도 그 애들은 그렇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 밝음을, 희망을 닮은 어조를 듣노라면 투정이 부리고 싶었다. 나는 그저 무서웠을 뿐이라고. 이번 생에서는 아마 죽어져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상상만 해도 창피하고 또 눈물이 울컥 날 것 같은 일이기도 했다.
하반 아이들이라면 헤이다유 말고도 몇 명이나 있다. 개중 유달리 상냥한 아이들에게 남몰래 어리광을 부릴 수 있다면 있을 것이다. 란타로나 쇼자에몽이라면 이런 투정도 모른 척 받아넘겨 줄 것이다. 동실의 사키치도 생각이 깊고 다정한 아이였으므로, 고요하게 손을 맞잡아 줄 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런 어둔 생각을 하면 끝에 꼭 헤이다유의 얼굴이 뒤따라 나왔다. 결코 없던 일. 오늘 밤에는 조금 뒤척였다. 흉이 질 허벅지의 상처가 따라 뒤채며 쓰리게 칭얼거렸다. 어쩌면 자신은 조금 반한 것일지도 모른다. 늘 그래 왔듯 생각을 억지로 삼키고 잠이 드는 밤이다. 다만 그 맛이 쓰기보단 시었다. 끝에 한 번 더 뒤쫓는 다짐이 있다. 절대, 들키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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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슬 위원회의 예산안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가 왔다.
위원회마다 갑작스러운 밤샘이며 긴급 회의가 이어졌다. 회계위인 사키치는 말 할 것도 없었다. 다른 위원회가 요란 떨기 한참 이전부터 늘 일이 미어지는 곳이었으니. 작법위는 그나마 조금 여유로운 편이었다. 평소 덴시치가 꼼꼼하게 정리를 해 둔 탓이다. 까마득히 어린 후배들 손에 넘길 틈도 없이 예산안이 차곡차곡 완성되어가고, 한 해의 기록도 흰 종이 위에 반듯하게 쌓여만 갔다. 헤이다유는 하품 하는 어린 것들을 재우러 보내고, 덴시치는 호롱불 아래 마저 기록을 써 내렸다. 수와 글자가 딱 떨어지는 글씨로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드물게도 오학년이 부장인 부이다. 얕보이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육학년 만큼 잘 해내야 한다는 마음이 맴을 돌았다. 장지문 열리는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졸음이 잠깐 밀려왔던 모양이다. 익숙한 인기척이 장지문 너머로 걸어 들어온다. 헤이다유. 후배들을 전부 배웅하고 돌아 온 모양이었다. 덴시치는 애써 그 쪽을 보지 않았다. 들키지 말자고 생각한 날 이후로는 뒷모습을 좇는 시선조차 조심스러웠다.
“수고했어. 가서 자.”
일부러 종이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퉁명스럽게 내뱉는 말.
이런 것이 싫다는 것이다. 속으로 아무리 짓씹고 노력해도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그 애들처럼, 헤이다유처럼 환하게 웃어 넘기지도 담담하게 체념하고 살아가지도 못한다. 슬프도록 한심하다. 저도 모르게 붓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종이 위에 동그랗게 불시착하는 먹. 얼굴이 찡그려진다.
헤이다유는 늘 하듯 짧은 저녁 인사를 하고 떠나는 대신 덴시치 곁에 앉았다. 들려야 할 장지문 닫기는 소리가 없다. 손가락을 내밀어 튄 먹을 닦아 내고, 새 종이를 꺼내 건넨다. 어슴푸레한 어두움 속에서도 새카맣게 먹이 밴 검지 손가락. 저도 모르게 멀거니 보았다. 능청맞게 씩 웃는 얼굴. 정신이 들어 고개를 팩 돌릴 적엔 이미 귀가 벌겋게 달아 오른 후였다. 모르는 척, 아니 정말 모르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건네는 말. 왜 네 말은 언제 들어도 모든 곳에 어울릴까. 그런 것이 참 부러웠다. 말은 못해도, 언제나 늘 그랬다.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나는 이런 거 영 못 하겠더라고.”
“…별로. 됐어.”
마주 웃지도, 따라 다정하게 말하지도 못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야속하게 자란 자신. 내년에는 얼마나 더 비틀릴까. 내년. 정말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임무가 내려오는 학년. 그러면 나는. 일순 침묵이 무겁게 쌓였다. 어떻게든 해 보려 너울대는 등잔불이 가엾다. 헤이다유가 실없이 조금 웃더니, 뒤춤에 숨기던 것을 꺼내 조용히 건넨다.
“이거.”
수건이었다.
좋은 향이 나고, 새하얗도록 깨끗한 수건.
맨 먼저 든 생각은 그 날 그 새벽의 일이었다. 비틀거리고 걷던 자신 앞에 나타나 몇 마디 말도, 추궁도, 위로도 없이 그저 방에 도로 데려다 놓은 날. 유령 같던 것은 제가 아니라 헤이다유였다. 꿈처럼, 악몽처럼 사람을 놀래키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군다. 아니, 헤이다유에게는 사실 별 일 아닐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그래도. 덴시치는 몰래 주먹을 꾹 말아 쥐었다. 짧은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며 칭얼댔다.
받지 않고 가만히 노려보는 모습. 헤이다유는 그런 형형한 시선을 받고도 그저 픽 웃어 넘길 뿐이다. 받으라는 듯, 앞에 내려 두고는 일어서 나간다. 나 자러 갈게.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말. 먹이 밴 손가락은 말아 감춘 채, 다시 건너 가려는 모습. 덴시치는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막아설 틈 없이 뛰쳐나가는 말.
“왜.”
왜 아무 것도 안 묻는데.
이상한 말이었다. 사실 헤이다유가 아무 것도 묻지 않아야 마음이 편할 터인데. 어쩌면 헤이다유는 그 나름의 마음을 써 주고 있는 것 뿐일지도 모르는데. 그런데도 목소리 맨 끝은 형편 없이 덜덜 떨고 만다. 눈치 채지 말기를. 모순적이다. 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면서, 기어코 참지 못하고 말을 하고야 말면서도 들키지 않기를 바란다.
장지문 앞에 선 헤이다유는 어둠을 둘러 쓴 채였다.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표정도, 무엇도 보이지 않는 채였다. 반쯤 돌린 고개. 실수로 나선 말이 붙잡은 걸음. 후회하기엔 늦는다. 자신은 늘 그렇다. 익숙한 후회가 뒤따르고. 양 허벅지며 옆구리에 그인 상처들이 일시에 성화를 부렸다. 아프다. 덴시치는 저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어둠 속에 선 헤이다유는 조용히 대답했다. 그리고 돌아서 방으로 향했다.
“네 일이고, 나랑은 상관 없잖아.”
덴시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헤이다유가 걸어 가고 없는 자리를 멀거니 바라보다가, 앞에 놓인 수건을 보았다. 그 날 자신이 쓰던 것이 아니다. 무늬가, 향이 다르다. 그 날 쓴 수건은 아마 핏자국이 빠지지 않았을 것이다. 희미한 먹 자국. 아마 아까 건넬 때에 묻었던 모양이다. 덴시치는 그 모양 그대로 수건을 집어 들었다가 놓았다. 기쁘고 섧었다. 지독하게 끔찍한 경험이었다. 고개가 숙여졌다. 뚝. 뚝. 바닥을 까맣게 물들이는 작은 동그라미들. 식은땀에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다리에 얹은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채 아물지 않은 채인 상처들이 도로 벌어져 피를 흘리고, 싫은 쇠비린내가 코 끝을 맴돌았다. 오늘부터 상관 없는 일인 것이다. 아니, 실은 맨 처음부터 상관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잠깐 꾸던 꿈이 끝난 듯 했다. 새벽 지고 아침 해 뜨듯이. 유령 같은 희미함으로 복도를 걷던 부연 감정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오늘은 더 아프고 싶었다. 영 잠들지 못해도 좋으니, 그저 그러고만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