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린 저녁 공기가
갑자기 일렁였다. 뒷뜰에 널어 두었던 빨래를
걷던 미와는 들판으로 내려앉는 용을 보며 기묘하게 들뜨는 기분을 억지로 가라앉혔다. 어스름하게 남은 저녁놀이
용의 가슴팍에 채워진 갑옷을 비추고, 군의 문장이 반짝였다. 동시에
미와는 빨래 바구니를 한 켠에 던져놓고 달리기 시작했다. 용의 등에서 내려서는 사람의 그림자가 연하게 드리우고,
심장이 그 짧은 거리를 견디지 못하는 척 널을 뛰었다. 보고 싶었다는 말이 딱 턱
끝까지 차올랐다. 연한 빛을 등진 그는 며칠 새에 더 날카롭게 말라 있었고, 그리고 여기저기 붕대가 둘러진 채였다. 미와는 덜컥 그 자리에 멎었다. 어두운 곳에서도 붕대 위까지 피가 밴 것이 보였다. 얼마 전에 들려 온 승전보는 그저 쉽게만
얻어 낸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가라앉은 표정을 숨길 수 없었다. 속이
상했다. 가칠하게 마른 뺨에도, 동여 맨 왼팔에도, 결코 떨어낼 수 없는 그림자가 보였다. 아직도, 아직까지도
그에게는 그 혼자만의 목숨이 제일 쉬운 모양이었다. 미와의 표정을 어떻게 읽은 것인지, 카이에게서 드문 변명이 따라나왔다.
“…약속은 지켰다. 확실히 살려 데려 왔다.”
그런 말이 아니었다.
용을 살려서 데려오라는 말이 아니었다.
당신이 살아
오라는 말이었다. 몸 성하게,
멀쩡하게 살아서 돌아 오라는 말이었다. 미와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뭐라고 해야 할 지는 잘 몰랐다. 보고 싶었다는 말은 스스로가 보아도 우스웠고,
승리를 축하하기에는 아직 종전의 때가 아니었다. 정작 입 밖으로 나온 것은 책망에
가까운 투정이었다.
“왜 그랬어?”
왜 다쳤어.
왜. 차라리 이전처럼 해서라도 다치지는 말았어야지.
날카롭게 따지고
묻던 말은 그 꼬리가 길지 못했다. 금세 먹먹한 물기를 먹고
아래로 추락하는 어조. 이럴 줄 알았더라면. 이런 결과가 나올 줄 알기만
했더라면 용을 내어주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출전하는 일이 없도록 했을 것이다.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물기 섞인 한숨이 짧게 흘러 나왔다.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속이 탔다. 잘못한 일이 없는데 그랬다. 미와가 했던 말 대로라면 그는 기뻐했어야 했다. 약속한 그대로 용을 살려서 돌아왔으니,
당연히 웃는 낯으로 반길 줄로만 알았다. 그럼에도, 원망하듯 캐묻는 말 뒤에는 따사롭게 걱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토록 아끼는 용을 이전처럼 죽여서
내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다치지는 말았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는 말엔 묘한 온기가 있었다.
카이는 섣불리 뭐라 대답하지 못했다. 뭐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낯설기만 한 온기가 다시금 어깨에 내려 앉았다. 간질간질. 손바닥 안이, 어금니 맨 안쪽이 애가 타도록 간질거렸다. 어둡게 가라앉은 표정의 미와가 고개를 들고, 눈가에 척척하게 묻어 나는 물기에 저도 모르게
겁이 더럭 났다. 미와가 하는 모든 일이, 건네는 모든 말이 지독하게
어색하고 또 설었다.
“…미안.”
사과하며 샐긋
웃어 보이는 눈가는 발갛게 흐린 채였다. 당장 비가 올 듯,
흔들거리는 눈. 카이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손 끝에 살짝 스치는 피부는 체온이 확실했다. 그것조차도 카이에게는 일종의 충격이었고 놀라움이었다.
이전에 잠깐 잡았던 손이 그제서야 기억이 났다. 얼마만일까.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것. 살아 숨쉬는 사람의 체온에 맨 피부로 닿아보는 것. 차마 힘을 주어 그러쥐거나 끌어 당길수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손 끝만 살몃 스치고 나는 것으로도
미안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물집과 굳은살이 배기고 손톱 밑까지 흙먼지와 핏기가 밴 손이라 그랬다.
왜 그가 그렇게나 서운한지 좀처럼 잘 알수가 없어서 그랬다. 다시금 손바닥 안에
원인 모를 열기가 고였다. 간질이듯 손바닥 안 움푹 패인 부분을 맴도는 온기.
미와가 우뚝
멎은 채 이 쪽을 빤히 보았다. 그리고 두 걸음,
성큼 걸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카이는 자기도 모르게 뒤로 걸음을 물리려 했다.
미와가 손을 잡았다. 용을 빌려오던 그 날처럼. 힘이 살짝 들어간 채 마주 잡는 손. 손바닥 안에 고이는 간질거리는 감각이 더 깊게,
깊게 파고들고 귓가에 열이 올랐다. 그 날과는 다르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단단하게 얽고 꼭 쥐었다. 어쩐지 모르게 뒷목에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반 보 더. 앞으로 살짝 걸어서 다가왔다. 어깨가 더 가까워지고, 숨결이 뺨에 닿았다. 깊게 파고드는
간지러운 온기가 살살 번졌다. 미와가 반 보를 더 가까이 다가서고, 카이는 차마 뒤로 물러설 수 없었다. 어깨에 살짝 닿았다가 망설이듯 멀어지는 손가락.
짧게 일렁거리는 한숨. 그리고는 결심한 듯, 어깨를 살짝 쥐고 그 쪽으로 가볍게 떠민다. 손바닥에 고이는 온기가 품 가득하게 번지고,
심장 근처가 맞닿았는지 박자가 다른 고동이 갈비뼈 안으로 깊숙하게 울렸다. 살짝
품 안에 가두듯 오른팔을 둘러 안은 미와는 한참 말이 없었다. 비행으로 떨어졌던 체온이 금세 온기에 옮아
높아지고, 달콤한 향내가 나는 품은 안락했다.
따스하고 편안한 품인데,
분명 그런데도 이상하게 심박이 빠르게 뛰었다. 머뭇거리는 카이를 달래듯 부드러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살짝 맴돌고, 기대라는 듯 어깨에 가만 밀어 놓는다. 손가락을 얽은 채 잡은 손은 금세 뜨겁도록 열이 올랐고, 미와가 아주 작게 속삭였다.
“….빗방울. 벌써 떨어지네.”
…그러니까, 하루만 있다가 가면 안 될까. 비오는 밤에
날면 위험하잖아.
조용하게 속삭이는
말에 귓가가 간지러웠다. 아마 그래서였으리라고 생각한다.
흐리기만 할 뿐, 비 소식이라고는 없이 건조한 하늘. 카이는 작게 끄덕였다. 그렇군. 비가 오는군.
미와가 다시금 짧은 한숨을 토하고, 맞잡은 손에 힘이 더해졌다. 간질거리는 온기가 심장까지 곧바로 옮아 가고, 카이는 살짝 눈을 감았다. 따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