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시치는 이유 모를 살얼음판 위에 서있는 것만 같은 사흘을 보냈다. 죄를 지은 것도, 책 잡힐 큰 일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불안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정신이 들면 자기도 모르게 헤이다유의 뒤통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기가 일쑤였다. 맞아야 할 매를 건너 뛴 어린애처럼 안절부절, 헤이다유의말 하나하나를 좇았다. 헤이다유에게 티가 나지 않을 리 없다. 불안하게 흐려진 정신 때문에 그런 눈치조차 없이 군 것이 분명했다. 제 시선에 제가 놀라 눈을 거두려는데, 헤이다유가 고개를 돌렸다. 도망칠 수도 없이 마주치는 눈동자. 퍼뜩 알아차리고 귀가 벌게질 무렵엔 이미 늦었다. 모두 돌아가고 둘뿐이 없는 어둑한 작법위원회실 안. 야속한 침묵. 헤이다유가 무심한 말을 건넸다.
“나한테 할 말 있어?”
말이 목구멍에 딱 걸려 나오질 않는다. 아교칠을 한 것 처럼 뻑뻑하기만 한 혓바닥.
덴시치는 고개를 황급히 돌렸다. 길다란 머리카락이 반 박 늦게 따라 고개를 돌리고, 연한 어둠조차 어색하게 변했다. 견디기 힘든 깔끄러운 공기. 덴시치는 몰래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 모르는 새 식은땀이 차갑게 맺혀 있었다. 머릿속은 온갖 말로 얼룩지고, 그 중 하나를 못 골라서 더욱 조급증이 났다. 뭔가,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사실은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 날 보았던 제 몰골에 대해서가 맨 먼저 하고 싶은 변명이었다. 사실 둘러대고도 싶었다. 다쳤노라고. 어쩌다보니, 아니, 뒷산의 덤불에 긁혔노라고. 그렇지만 그 어떤 말도 나오질 않는다. 단 한 마디도.
“없음 말고. 싱겁기는.”
나 자러 갈게.
딱히 대답을 듣고 싶었던 건 아닌지, 혹은 뚜렷한 시선이 자꾸만 따라오는 것이 영 껄끄러운 것인지. 장지문 너머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고야 마는 등은 생각보다 곧았다. 헤이다유는 속내를 짐작하기 힘든 사람이었다. 마냥 즐겁기만 한 듯, 소리 내 경쾌하게 웃다가도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고는 했다.비아냥이나 비꼼 섞인 제 말도 유하게 받아 웃어 넘기다가도, 한없이 묵직하게 가라앉기도 한다. 요 사흘간 보아 온 헤이다유는 더더욱 그랬다. 추가 이리저리로 옮겨가는 그네 같았다. 덴시치는 속으로 말을 꿀꺽 삼켰다. 놀라 살짝 벌어진 입술 너머로 말을 닮은 한숨만 나오고 말았다. 잘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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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시치는 손 안에 들고 있던 수리검을 놓았다. 어쩐지 영 맥이 풀린다. 이전에 그랬듯 제 살을 그으려 해도 헤이다유의 표정이 어른거려서 기분이 나질 않았다. 그 새벽에 흘긋 스쳤던 표정. 금세 장난기 혹은 의중 모를 모호한 표정으로 덮어버렸지만, 아주 잠깐 보인 그 표정은 쉬이 잊히질 않았다.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눈동자. 일순 흐트러지는 여유. 걱정하는 얼굴이었다.
왜 이런 짓을 하느냐는 질문이 뒤따를 줄로만 알았다. 거기에 대답할 말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솔직히 답할 수는 없어도, 추려 낼 수는 있었다. 덴시치는 무서웠다. 매일 간접적으로 죽음을 마주하는 것이. 지금 이렇게 닳도록 외고 쓰는 이 인술을 조금만 틀려도, 판단에 가벼운 실수만 있어도 바로 죽는 길로 가는 것이라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어린 시절엔 그저 멋도 모르고 열심히 공부했다. 교과서가 손때가 타도록 외우고, 밤을 새우며 시험 공부를 하고. 어쩌면 그 때부터 무서웠던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개죽음을 당한다. 그 압박감에 떨다가 정작 다쳤을 때엔 속이 후련하기까지 했다. 일종의 증거였으므로. 생존의 증거이기도, 덴시치 스스로가 아직 목숨 달린 상황을 쥐락펴락 한 채라는 증명이기도 했으므로. 아픔은 참을 만 하다. 빈혈감이 주는 나른한 휴식. 통제력에의 묘한 확신.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심하게 스트레스를 받거나 불안한 날에는 저도 모르게 제 살을 베고 있었다. 속으로 몰래 감춘 말. 상처처럼 동여 매 싸 둔 속내. 한심한 자신. 나약해 빠진.
결국 덴시치는 수리검을 갈무리해 넣어 두었다. 수건도 잘 개켜 치우고, 한숨과 함께 아부자리에 누웠다. 길게 흩어지는 머리카락. 간질거리는 기분은 그저 머리카락이 뺨에 닿아서일까. 그도 아니면. 거기까지만 생각하고 눈을 감았다. 온종일 긴장했던 몸은 쉬이 잠들었고, 숨소리는 잦아들었다. 단 잠이 쉽게도 흘러왔다.
음 원고도피용으로 가끔 쓸 듯...끝이 어케날지는 며느리도 모름...물론 나도 모름 ^^)b 자해 소재 주의
자신은 학생이었다. 그것은 입학 하고서도 근 오 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는 사실이었다. 덴시치는 멍한 머릿속을 더듬어 생각을 마저 이어나갔다. 어디의 학생이느냐 하면 인술학원의 학생이었다. 그러면 인술 학원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인술을 배운다. 인술이란 무엇인가. 덴시치는 먼지가 부유하는 천장에서 시선을 돌렸다. 작은 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피였으므로, 그보다, 덴시치는 생각을 마저 하고 싶었다. 인술. 그것은 덴시치에게 있어 지금 이 행위와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원초적인 칼부림. 머리가 비상한 것이 아니라 비열해야만 살아남는 것. 그런 것을 오 년간 배웠고, 일 년을 더 배워야 한다.
거기까지 생각하고는 오른팔로 곁을 더듬어 붕대와 고약을 집었다. 허옇게 드러 내 놓은 허벅지에서는 핏줄기가 아직도 가늘게 흐르는 채였다. 이젠 딱히 아프지조차 않다. 오히려 얕은 꾀만 늘었다. 어떤 식으로 수리검 혹은 단검을 세워서 얼마만치 찔러 넣고 그어야 피가 심하게 나지 않는지. 어떻게 상처를 동여 매고 약을 발라야 금세 낫는지. 이렇게 하는 데엔 사실 별 이유가 없었다. 아픔과 빈혈기가 뒤섞인 가운데에서 하는 생각은 덜 아팠고, 다음 날을 더 쉽게 보낼 수 있게 도왔다. 이런 위험한 취미에 급작스레 재미를 붙인 것은 불과 최근이었다. 피가 빠져나가서일까, 멍한 머리로 하루를 보내고 있노라면 발작적인 걱정도 자기 일이 아니었다. 한 번 우연히 다치고 나서 깨달은 진공 상태는 그 중독성이 강했다.
동실을 쓰는 사키치는 회계위 일로 밤 늦게나 들어오기 일쑤였고, 호롱불 작게 켜 둔 방 안에서 덴시치는 내내 혼자이고는 했다. 그러면 수건을 도톰하게 접어 대 놓고, 지금처럼 몸에 야트막한 칼집을 낸다. 기묘한 통제감과 익숙해진 고통이 뒤따르고, 능숙하게 상처를 싸맨다. 피가 물든 수건은 아무도 보지 않는 밤 혹은 새벽에 몰래 들고 나가 찬 물에 흔들어 빤다. 새벽에 수건을 빠는 날에는 예습을 할 시간 또한 생기므로 이득이다. 물론 기분은 참 이상했다. 아무도 깨지 않은 흰 새벽에 유령 같은 흰 침의 차림으로 피 묻은 수건을 들고 거니는 사람이라. 어딘가의 기담에 나올 것 같은 몰골이 분명하리라.
그 날 새벽도 그런 생각을 하며 조용조용 걸어 나갔다. 고된 회계위 활동에 지쳐 잠든 사키치도, 바로 근처 방에서 깊이 잠들어 있을 동기 친구들도 선생님들도 전부 뒤로 하고. 손에는 피가 말라 붙은 수건을 감아 쥐고 우물가로 까치발을 들고서. 그렇게 정말 죽어 사라지고 없는 사람처럼 새벽을 가로지른다. 우물가에 닿기가 무섭게 머릿속이 핑 돌았다. 어제는 자기도 모르게 지혈이 늦어졌다. 아니, 자해를 하는 빈도가 잦아진 것도 이유일 수 있다. 귓가가 웅 울리고, 무슨 소리가 섞인다 싶었다. 그 순간, 고개가 확 쳐들렸다. 너무 놀라서 정신이 확 들었다. 확 모여든 초점에는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사사야마 헤이다유. 그 순간 든 생각은 딱 하나였다.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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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어디 다쳤어?”
얼굴 색이 유령같애.
눈이 휘둥그레해져서 새하얀 침의 위를 위 아래로 빠르게 훑어본다. 걱정은 기분 나쁘지 않다. 어디까지나 선의라는 것을 알아서이다. 다만, 숨기려던 모습을 들킨 것은 영 싫다. 저도 모르게 대답이 늦어졌다. 아니. 헤이다유의 얼굴이 의심으로 찡그려진다. 덴시치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선생님이나 웃어른도 아닌데. 눈치 볼 이유도 없는, 그냥 같은 학생일 뿐인데. 친한 친구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거리감 때문일까.
“생리하는 건 아닐 거 아냐.”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이 치미는 농담에 얼굴을 팍 찡그리자 맞받듯 씩 웃는다. 동시에 맥이 탁 풀렸다. 수건을 빨 생각도 싹 날아간다. 그냥 하나 버린 셈 치자는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대꾸도 않고 돌아서려던 찰나, 어깨가 휙 돌아갔다. 손아귀에 힘을 어찌나 콱 넣었는지 쇄골이 다 얼얼했다. 뭐라고 대거리를 하려던 순간이었다. 허리끈이 휙 잡아채인다. 얄팍한 침의 천이 벌어지고, 싸한 새벽 공기가 피부를 덮었다.
차갑고 깨끗한 공기를 뚫고 시선이 또렷하게 닿았다. 목에서부터 다리 맨 끝, 발가락까지 꼼꼼히 닿았다가 거두어지는 시선. 이유 모를 수치심이 뱃속에서부터 올라왔다. 상처 하나하나에 닿았던 시선이 쓴 약처럼 따갑다. 뭐라 변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기도 전에 헤이다유는 허리끈을 도로 여몄다. 손에 들었던 수건을 빼앗아 제가 들고, 어깨를 살살 민다. 기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덴시치 또한 별 말을 하지 못했다. 뭐라 변명해야 할 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헤이다유는 기어코 덴시치를 방 앞까지 데려다 놓았다. 머뭇거리고 있자 손수 문까지 조용히 열어 어깨를 떠민다. 잘 자. 솜털같은 목소리. 여전히 남아있는 무겁고 불안한 기분. 문을 밀어 닫는 손길을 부드럽고 또 고요했다. 변명도 듣지 않겠다는 듯. 덴시치는 멍하니 닫긴 장지문을 바라보았다. 그림자조차 사라지고 없는 그 너머는 대답 또한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