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와 닿거나 하지는 않아도, 그래도 무딘 날붙이처럼 지긋이 마음 한 켠을 짓누르는 기억.
숨을 쉴 적마다 그 무디고 찬 날이 숨통에 슬몃 닿았다가 떨어졌다.
“그렇잖아요.”
나는 아무 말도 못 하는 채로 그냥 바라보았다. 네가 가끔 치던 피아노. 그 보드라운 색채가 오늘따라 시신경을 아프게 했다. 왜일까. 너무 부드러워서일까.
네가 아무 의미 없이 건반을 하나 길게 눌렀다. 동시에 커피포트가 서럽게 울었다. 너는 피아노 의자를
직 끌고 일어나서, 커피를 따르고, 잔을 두 개 놓고,
그리고.
“어차피 흩어지는 것들인데.”
붙잡아서 뭐 하나 싶고, 그래요.
나는 반박할 수 없었다. 그 애에게 묻고 싶었다. 나도 너에게는 그저 흩어져버릴 사람이냐고, 그 찬연하게 아롱대던 우리의 날들도 결국엔 흩어져버릴 거라고 생각하느냐고. 그렇지만 말은 차마 기도를 타고 올라오지 못했다. 그저 삼켜질 뿐이다. 네 앞에 놓인 커피처럼. 도로 뱃속으로 기어들어갈 뿐이다.
네가 한 모금, 커피를 마시고는 살며시 고개를 외로 기울였다. 상 밑을 더듬던 흰 손가락에 들린 작은 병. 나는 알면서도 가만 바라보았다. 나에겐 그 병을 억지로 빼앗아 내던질 권리가 없었다. 오히려 그 병에 담긴 건 내 죄였다. 너를 이렇게 위태하게 흔들리는, 부옇게 흩어지는, 안개 같은 사람이 되도록 내버려 둔 내 죄. 내 죄는 참 맑았다. 눈물처럼 투명한 액체가 반절 정도 든 그 병을 잠깐 응시하던 너는 입술을 달싹였다. 아무 말도 나오진 않았다. 나는 바라볼 뿐이었다.
등 뒤에서 나와 같은 태도를 취하고 선 카메라가 작은 소음을 냈다. 나는 직감했다.
두 번 다시 사진을 찍진 못하겠구나. 나는 그런 여생을 보내겠구나.
네가 병을 기울여 그 말갛게 서글픈 액체를 커피잔 안에 부었다. 나는 숨이 턱 막혔다. 당장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네가 숨쉬도록 붙잡아 둘 수 있는데. 지금 저 잔을 깨어버리기만 한다면.
네가 잠시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엷고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그 옅은 표정을 본 나는 그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잔을 깬다고 해서, 네가 사라지지 않으리라는 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쓰리게 내 커피에 녹았다. 나는 부러 내 잔에 손도 대지 않은 채였다.
너무 쓰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상황이,네 그 여린 미소가, 그 검은 액체에 고루 녹아서. 그래서.
네 입술이 잔의 가장자리에 고요하게 닿았었다.
네 목울대가 슬픔을 진하게 탄 커피를 한 모금 기어이 넘겼었다.
네가 불안하게 흔들거리면서도 뭐라고 입술을 열었다.
그 고통 속에서도 끝끝내 나에게 하려고 했던 말이 한 마디.
나는 넋을 읽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었다. 그리고. 그리고 어땠더라.
커피가 차게 식었다.
살몃 쥐고 있던 네 손도 식었다.
나는 조용히 너를 올려다 보았다. 초점 없는 눈.
참았던 그 모든 감정이 일시에 터져 나왔다. 그 고요하고, 일견 평화스럽기까지 한 죽음 앞에서
나는 숨죽여 오열할 뿐이었다. 네 숨이 천천히 잦아드는 그 소리를 놓칠까 봐서, 그래서 목청껏 울음을
꺼내어놓지도 못하고 꺽꺽거리고 삼켜가며, 그렇게 새로운 슬픔을 액체로 흘려 낼 뿐이었다.
그 모든 것들의 뒤에 남겨진 나는 스러진 채였다. 매일 내 존재를 으깨는 그 날붙이의 넓은 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