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다유는 눈을 찬찬히 깜박였다. 저 애가 제 발로 여기까지 온 것은 난생 처음 보았다. 솔직히, 장난 아니게 놀랬다.
"도이 선생님하고 이야기 끝났어."
왁자하던 점심시간의 교실은 덴시치의 등장으로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죽 아래에 소란을 억지로 집어 넣고 입을 다문 어린 강아지 같은, 위태한 침묵.
헤이다유는 덴시치를 빤히 바라보며 팩에 든 주스를 힘껏 빨아들였다. 쪼륵 하는 소음에 덴시치가 얼굴을 잠깐 찌푸렸다.
아무 대답도 안 하고 멍하니 앉은 채인 헤이다유의 발을 단조가 몰래 콱 밟았다. 승마하는 놈이라 그런지 지독하게 아팠다.
헤이다유는 고통스러운 신음을 참았고, 그새 덴시치는 고개를 외로 돌려버렸다.
"잠깐 이야기 좀 하지."
덴시치는 저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영 불편한 것 같았다. 그제야 그 어색한 분위기를 알아챈 헤이다유가 느릿하게 일어섰다.
등 뒤로 들러붙는 시선들이 참 끈질겼다. 앞장 선 덴시치를 따라 걷던 헤이다유는 교실 뒷문을 요란스럽게 닫았다. 분풀이를 닮은 소리에 덴시치의 걸음이
잠깐 멎었다가 이어졌다.
덴시치가 걸음을 멈춘 곳은 자판기가 두 대 있는, 한산한 야외 복도였다. 덴시치가 급작스레 걸음을 멈추는 바람에, 헤이다유는 하마터면 그 뒤꿈치를 밟을 뻔
했다. 짧은 한숨을 내쉰 덴시치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자판기에 넣었다. 헤이다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모양새만 멀뚱히 바라보았다. 덴시치의 손끝이
녹색으로 빛나는 버튼 하나를 두 번, 연달아 눌렀다. 철제 캔이 자판기 바닥으로 요란스럽게 낙하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니, 눈 앞에 냉기를 끼치는 캔 하나가
불쑥 디밀어졌다.
"자."
헤이다유는 묵묵히 음료수를 받아들었다. 초코라떼라고 쓰인 연갈색 캔이 굉장히 낯설었다.
남학교에서 누가 이딴 걸 사 마시겠냐며 비웃던 것이 당장 어제 일인데. 덴시치는 익숙하게 캔을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헤이다유는 그 생경한 모습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달콤한 음료수만 홀짝였다. 시야 외곽에 들어오는 젖혀진 목덜미가 희었다.
"도이 선생님이 너 금연 시키라고 하시던데."
그만 사레가 들릴 뻔 했다. 기도로 넘어가려던 들큰한 액체를 간신히 추스린 헤이다유는 캔으로 숙였던 시선을 퍼뜩 치켜올렸다. 덴시치는 거기 서 있었다.
새침한 무표정. 손에 쥐여진 똑같은 캔. 헤이다유는 급하게 목소리를 틔웠다.
"진짜로?"
농담으로 받아들이지도, 그냥 대충 시늉만 한 것도 아니고, 진짜로?
왜냐고도 말해주던가 하는 질문이 뱃속에 응어리져서 나오지 않았다. 저 새침한 표정 너머로, 너는 무슨 생각을 할까.
헤이다유는 그제야 아차 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 말을 꺼낸지 겨우 하루 지났는데, 벌써 확답을 받아 두었다는 데에서 도이가 얼마나 헤이다유의 금연을
염원했는가가 선명하게 보였다. 덴시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내신 점수 주신대. 너 금연 시키면."
헤이다유는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내고야 말았다. 역시 도이는 대단했다. 우수반인 이반 학생 덴시치에게 먹히는 방법도, 저 같이 멋대로 구는 어설픈
반항아를 다루는 방법도 전부 꿰차고 있었다. 덴시치가 잠깐 머뭇댄다 싶더니, 무표정 대신 조금 불안한 얼굴로 헤이다유를 말끄러미 보았다.
".....싫어?"
헤이다유는 본능적으로 눈치 챘다.
"쿠로카도 군. 그 점수, 필요해?"
정곡을 찔린 듯, 덴시치의 어깨가 옴작거렸다. 살짝 겁 먹은 것같이 움츠린 어깨.
헤이다유는 자연스럽게 걸리는 희미한 미소를 억지로 숨기지 않았다. 도이 선생은 진짜 천재라니까.
헤이다유는 손 안에 담긴 음료수캔을 슬쩍 흔들어 보았다. 반 정도 남은 액체가 기분좋게 출렁였다. 캔에서는 지금 선 그늘과 비슷한 냉기가 흘렀다.
대리석 복도 바닥이랑도 비슷한 그런 온도. 눈 앞에 선 덴시치의 손끝도 꼭 그런 온도일것만 같았다.
"그럼, 쿠로카도 군이 필요한 만큼 열심히 선도해 줘."
덴시치의 얼굴이 일순 밝아졌다. 그 재빠른 변화에는 어쩐지 좀 귀여운 구석이 있었다.
"....그렇게 하면, 대신 여름방학까지는 확실히 금연 해 줘."
중간고사 때 까지는 꼭 필요한 점수인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헤이다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종시에 예비종이 울렸다.
덴시치는 짧은 인사와 함께 잰 걸음으로 저를 스치고 걸어갔다. 수업종도 아닌데 왜 저리 일찍 교실에 돌아가는 걸까. 헤이다유는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
난제에 골몰하며 느리게 복도를 걸었다.
교실 뒷문을 조용히 열자, 몇 십쌍의 눈동자가 일제히 헤이다유를 바라보았다. 까끌하게 마른 입술을 핥는데, 산지로가 맨 먼저 말을 걸었다.
"헤이쨩, 이반 애를 괴롭히면 못 써."
여기저기서 동조를 닮은 아우성이 터져나왔다.
역시 그렇게 보이나, 하는 한탄 비슷한 한숨이 길게 빠져나왔다. 헤이다유에겐 변명 아닌 변명을 하는 수 밖엔 선택지가 없었다.
"그런 거 아니거든?"
단조가 불신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헤이다유를 응시했다. 그 짜증을 일으키는 시선에 성질을 왈칵 내려는데, 쇼자에몽이 한 마디 거들었다.
"그래, 헤이쨩. 이반애들이 가끔 재수 없게 군다고 해서 괴롭히고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아니라고 하잖아. 그냥....그.....동아리 일 때문에 그래."
"뭐? 너 그 예법 동아리 아직도 나가? 거짓말이지?"
단조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을 재촉했다. 헤이다유는 그만 맥이 탁 꺾여버렸다.
하긴, 자신과 덴시치 사이에 공통점이라곤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이런 반응도 무리는 아니었다.
"가끔이지만 나가. 진짜 괴롭힌 거 아니라니까. 정 의심가면 직접 가서 물어보던가."
귀찮은 날벌레를 쫓듯 손사래를 치는 헤이다유를 본 아이들은 그제야 안심하고 제자리로 하나 둘 돌아갔다.
단조롭게 울리는 수업종 소리를 들으며 헤이다유는 생각했다.
덴시치와 나의 공통점.
하나. 같은 학교의 고 3 학생이라는 것.
둘. 일단 명목상 같은 동아리라는 것.
잡생각을 뚫고 도이 선생이 앞문으로 들어섰다. 헤이다유가 책상 서랍을 더듬어 문학 교과서를 찾는데, 옆자리의 산지로가 조그만 소리로 말을 걸었다.
"헤이쨩, 이거 헤이쨩이 마시던 거야?"
책상 모서리에 놓인 연갈색 음료수 캔.
헤이다유는 애매하게 소리를 늘여 대답했다. 응.
산지로가 미심쩍은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치만 헤이쨩은 단 거 안 좋아하잖아."
헤이다유가 뭐라 대답하려는 찰나, 쇼자에몽이 일어섰다.
"선생님께 경례."
학생들의 인사소리가 교실 안에 꽉 차는 사이를 틈타, 헤이다유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그러게 말이야."
산지로는 조금 더 의아한 표정을 지었을 뿐, 금세 도이 선생의 수업 소리에 집중하고 고개를 돌렸다.
헤이다유는 얌전히 책상 구석에 앉은 연갈색 캔을 흘끔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것 만으로도 들큼한 향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헤이다유는 결국 문학 수업시간 한 시간 전부를 다짐을 되새기는 것으로 낭비하고야 말았다.
쉬는 시간 끝날 떄 까지는, 꼭 전부 마시자.
같은 캔을 살며시 쥐고 있던 손끝. 체온이 유달리 낮아보이는 흰 손톱. 짧게 따라다니던 그림자.
헤이다유는 고개를 아주 살짝 끄덕였다. 습관적으로 물어뜯는 볼펜 끄트머리가 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