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단편/잣이사] 네게 간다
이사쿠 부상소재 주의. 풋풋하고 소녀심돋는 잣토씨 주..의..?
때는 아직 무로마치, 온갖 군데서 크고 작은 싸움이며 전쟁이 매일마다 일어나고 지는 와중에 미담 같은 소문이 돌았다. 승려 복장을 한 젊은 청년이 싸움터며 전쟁터마다 나타나 다친 사람들을 돌봐주고, 상처도 싸매 주고, 고마워서 건네는 돈이며 금덩이도 거절하고서 그렇게 전쟁터마다 전전한다는 것이었다.
그 청년은 얼굴이 멀끔하고, 덩치가 작은 말에 약초며 붕대를 바리바리 싣고서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왼쪽 다리가 불편한지 걸을 적마다 전다고 한다.
아아.
잣토 콘나몬은 아래 부하들이 그냥 생각 없이 떠들던 소문에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눈을 감아도 선명한 모습에 잣토는 마시던 찻잔도 내려놓고 한숨을 쉬었다.
너는 결국, 그런 길을 가는구나.
“참 생보살이라는 말까지 돌더군. 하기사 죽이려고 덤벼드는 사람조차 웃으며 치료해준다는데, 그게 보살이 아니면 뭔가 싶긴 해.”
“세상이 어지러우니 이런 사람도 다 있구만. 나는 산 넘을 적마다 돈이나 짐 뜯으려고 달겨드는 산적들밖에는 없는 줄 알았지 뭔가?”
가벼운 농담을 곁들여 마을이며 성내를 떠도는 승려 청년에 대한 소문을 간식 삼아 차를 마시던 한 무리의 남자들은 잣토가 일어남과 동시에 자세를 바로 했다.
“두령님.”
“아아. 그냥 방으로 돌아가는 것뿐이네.”
손사래를 치고 조용조용 방으로 돌아온 잣토는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아직도 그 애를 기억한다.
높게 올려 묶은 연한 색깔 곱슬머리. 새끼 여우 같은 눈매로 잘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살갑게 굴던 아이.
곧잘 함정이나 돌부리 같은 데 빠지고 넘어지고 해서 상처를 달고 살면서도 남의 상처는 그냥 보아 넘기질 않는 모습이 참 생소하고도 고왔는데. 그런 너는 결국에 전장에서 홀로 남의 상처를 보기를 택했구나.
서운함과 함께 지난 추억들과 사랑스러운 안타까움이 덩어리져 마음 속에 무겁게 몰아쳤다.
결혼 한 적은 없지만, 내 아이가 생기면 꼭 이런 느낌일까 싶던 시절도 있었다.
지금이야 그것과는 조금 다른 감정임을 알지만, 그때는 그랬다.
이건 좀 부끄러운 말이지만, 잣토는 어깨에 조그만 다른 아이를 앉히고, 곁에 그 애를 앉히고 있노라면 꼭 자기 가족을 이룬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어딘가 간질거리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하고 그랬다. 자주 볼 적엔 곧잘 그랬지 싶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 작은 애는 지금 4학년, 아니, 5학년이 다 되었다.
몰아치는 감정들은 곧 저 편에 묻어둔 기억들을 불러일으켰다. 손나몽이나 진나이등 부하들과는 다른 의미로, 그 애는 잣토에게 있어 가족 비슷하고 애인 비슷한, 그런 존재였다. 그 애가 곧잘 편지를 써 보내는 바람에 팔자에도 없던 편지놀음을 했던 적도 있다.
그냥 흰 종이에 먹으로 멋없이 써 보낸 제 편지와는 다르게 참 단정하게도 써 보낸 그 애의 편지는 언제나 은은한 약 냄새가 났다. 꼭 그 애와 같은 냄새가 나는 바람에, 그 편지를 처음 받았을 땐 가슴이 조금 설레기까지 했다. 봉투 안엔 말린 꽃잎이며 향내 좋은 약초 뿌리가 들은 날도 있었다. 그 평범한 학교 이야기를 읽으며 자신은 얼마나 이상한 기분을 느꼈던가? 잣토는 아직도 그 향내가 코 끝에 맴도는 것 만 같았다. 그와 같이 잊고 살던 그리움이 왈칵 밀려왔다. 잣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끝자락에 그리움이 같이 묻어 나왔다.
그 애가 졸업하던 때, 잣토는 전날 오후에 그 애를 찾아갔었다.
조금 서운하게 웃으며 바닥을 보는 모습에 그만, 우리 성에 오지 않겠느냐는 말이 입 밖으로 쉽게도 나왔다.
갑작스레 미소를 지우고 시선을 내리는 작은 고개를 따라 시선을 내리자, 발목에 흰 붕대가 감겨있는 게 얼핏 보였다. 너는 이런 계절에도, 이런 때에도 다치고 다니는가 싶어서 조금 마음이 짠했다.
그리고 바닥을 보며 발장난을 치던 그 애는, 한참을 뜸을 들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잣토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잣토는 자연스레 그 애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그런데도 아이는 아직 발장난을 치며 바닥을 본 채였다. 그게 잣토는 아주 조금, 아주 아주 조금 서운했다.
잣토는 조용히 아이의 반은 자라고 반은 어린 모습을 바라봤었다. 손나몽이 어릴 적 생각도 나고, 저 어릴 적 생각도 나고. 바로 몇 달 전 같이 차를 마시던 아이는 선이 조금 더 굵어져있었다.
그런 게 참 소소하고, 새롭고 그랬던 기억이 났다.
“저, 왼쪽 다리...계속 절 거래요.”
아이는 죄 진 것 마냥 고개를 푹 숙이고 들지를 못했다.
나무로 된 마룻바닥에 점점이 떨어지는 물방울에 잣토는 마음이 쿵 내려앉았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 애의 손을 잡으려고 했었다.
그 마음을 눈치 챈 것 마냥 얄궂게도 아이는 뒤돌아서 천천히 걸어갔다.
잣토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음이 무거운 만큼 다리도 무거웠다. 너무 무거워서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닌자는 앞으로도 못 할 거에요.”
기어들어가는 작은 목소리가 간신히 귓가에 닿았다.
그 자리에서 손을 뻗다 말고 멀뚱히 서 있는 잣토를 향해 아이는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다시 뒤돌아서 달려갔다. 달리면서도 저는 다리가 눈에 들러붙어 떠나질 않았다. 모퉁이를 돌자, 그를 따라 아이의 머리채가 너울거렸다.
잣토는 그 머리채의 맨 끝이 멀리 사라질 때까지, 손을 거두고 꼭 쥔 채로 그 자리에 계속 서 있었다.
잣토는 천천히 추억을 떠올리다가 문득 방에 붙은 작은 서랍장을 뒤적였다.
그 애가 보냈던 편지 뭉치가 손 안에 고스란히 담겨 나왔다.
아직까지도 은은하게 감도는 향기에 잣토는 눈앞이 아득해졌다.
네가 보살이라면, 나는 그 끝자락이라도 좋으니 너를 다시 봐야겠다.
어떻게 잊고 살았나 싶을 정도의 애정의 무게가 가슴에 남아 묵직했다.
잣토는 눈을 감으며 손나몽을 불렀다. 늘 제 근처에 대기하는 그답게 대답이 곧바로 돌아왔다.
“지금 전쟁중인 성이 어디랑 어디였지?”
5년 만에 그 애를 보러 가는 길이 고운 꽃 길이 아닌 전쟁터라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지만, 그런 건 사실 큰 문제가 못 됐다. 중요한 건 잣토 자신이, 그 애를 보러 간다는 것이었다. 다시 한번 더, 그 미소를 볼 수 있다는 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사쿠.”
잣토는 흘러나온 이름에 피식 웃으며 편지를 다시 갈무리해 서랍장에 넣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공기 중에 아직 감도는 약 향기가 좋다. 오늘 밤 이 향내와 함께 잠들 생각을 하니 벌써 꿈에라도 그 애가 보이는 것 같았다. 잣토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 내 웃어버렸다.
손나몽이 무슨 일인가 물어왔지만, 솔직히 말 할 수 없었다.
손나몽, 나는 내일 5년만큼의 그리움을 흩날리러 간다네. 그것도 혼자 말이지.
마음 속에 무겁던 그리움이 조금 더 사랑스럽게 변하는 게 느껴지는 게 또 우습고도 고와서, 잣토는 몇 분이나 그렇게 혼자 웃었다.
아직 봄인데도 해가 중천에 뜨자 공기가 후끈했다.
이사쿠는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소매로 훔치고서 계속 걸었다.
여기 도달한 건 아침 때인데, 벌써 해가 저렇게 높이 떴다. 이렇게 온도가 높아서야 살 사람도 탈수증상으로 죽는 수가 있다. 특히 부상자라면 더 하다. 이사쿠는 느려지는 다리를 재촉했다. 쉰 목소리로 한 번 더 외쳤다.
“누구 살아있는 사람 없습니까?”
제발. 한 명이라도 더.
간절한 바램을 담아 소리치는데도, 주위는 죽은 듯이 고요했다. 아니, 죽었기에 고요했다.
매번 전장을 갈 때마다 그 한 번 한 번이 똑같았다.
전쟁은 부상자와 시체와 절망밖에는 남기는 게 없다. 저 너머엔 승자가 있을 지 몰라도, 적어도 전쟁터에는 그랬다. 이사쿠는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곱씹으며 그 자리에 석장을 짚고 서서 경을 외웠다.
정식으로 법명을 받은 승려는 아니지만, 그래도 마음을 담아 저 세상에서라도 편하길 빈다.
그게 이사쿠가 매일 하는 일이었다. 죽은 자의 명복을 빌고, 간신히 살아남은 자를 건강하게 살려놓는 것.
한 사람 한 사람 무덤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이 못내 안타까워서 지나는 걸음걸음이 느렸다.
이사쿠는 이렇게 전쟁터를 다닐 적 마다 싫어도 동기들 생각에 아는 사람들 생각이 났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가깝게 느껴지는 걸 지도 몰랐다. 누구는 전쟁 닌자가 됐다던데, 누구는 어디 성에서 일한다던데. 전장에 갈 적 마다 조금이라도 친우들과 비슷한 모습이 보이면 심장을 들었다 놓은 것처럼 놀란다.
자기가 막 인술학교에 들어갔을 적부터 전장에 다닌 한 사람 생각도 났다. 그 사람이야말로 전쟁을 자주 할 텐데 싶어서 참 마음이 안 좋았다. 이런 지옥을 그 사람은 얼마나 오래 다닌 걸까 하고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까지 들었다.
이사쿠는 한 번 더 소리쳤다.
누구 살아있는 사람 없습니까.
잣토는 지금 마음이 매우 복잡했다.
부러 일도 미뤄두고 보러 온 이사쿠는, 정말 제가 그 일을 좋아서 택한 건가 싶을 정도로 고된 일을 하고 있었다. 딱히 큰 보상이 따르는 것도 아니고, 전장이 끝난 후라도 전장에 돌아다니는 건 위험한 일이다. 키가 좀 크고 얼굴이 말랐다. 고생으로 불거진 손 마디가, 소리치느라 쉰 목소리가 어쩐지 가슴에 사무쳤다. 피곤으로 끄는 왼쪽 다리가 마음 한 구석에 길게 상처를 그었다. 그 어리던 애가 저렇게 커서 스스로 저런 길을 걷는다. 잣토는 왠지 엄숙한 기분이 들어 눈앞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살아있는 보살이라고 했던가. 정말 살아있는 숭고하고 신성한 무언가를 보는 듯, 마음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죽 존재해오던 그리움이 위태롭게 일렁였다. 무엇보다도 예전엔 반짝이던 눈동자가 절망 비슷한 것으로 일그러져 있는 모습이 참기가 힘들었다. 잣토는 모습을 숨기고 있던 나무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이사쿠는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반사적으로 뒤돌았다.
누군가 막 나무에서 뛰어내린 듯 나뭇잎이 몇 개 공기 중에 흩날렸다. 키가 훤칠하게 큰 사내다. 그것도 복면까지 쓰고 버선까지 신은 닌자다. 이사쿠는 본능적으로 긴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의문점이 들었다.
저 닌자복 색이, 훤칠한 체격이 눈에 익은 탓이다.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사내는 어느 새 근처까지 와 있었다. 석장을 앞에 두고 품 속의 무기를 확인하는 이사쿠를 본 사내는 순식간에 달려 거리를 좁혔다.
긴장으로 굳는 머릿속을 달래며 이사쿠는 수리검을 하나 꺼내 휘둘렀다. 사내는 억센 손을 들어 가볍게 그를 막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사쿠는 긴장이 풀렸다. 가까이 온 사내는 학생 시절 자주 보던 남자였다. 이사쿠는 그만 웃어버렸다.
“잣토씨. 오랜만이네요.”
수리검을 거둬 품 속에 넣으며 다시 이사쿠는 방긋 웃었다.
이 남자라면 자길 해치지 않으리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를 직접적으로 도운 건 딱 한 번뿐이지만, 그 이후로 그는 자기와 가깝게 지내주었다. 심지어 이사쿠는 사실 학생시절 그와 주고받은 편지를 아직까지 못 버리고 지금 사는 절에 숨겨 놓기까지 했다. 딱 한 통, 못 보낸 편지는 품 속에 지니고 다녔다.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사쿠는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났다. 그 근원인 남자가 눈 앞에 있는 게 못내 반갑고 좋아서 이사쿠는 좀 부끄러운 느낌까지 들었다.
잣토도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리검을 휘두르는 모습이 제 몸은 지키겠구나 싶어서 마음 한 켠이 놓였다.
“오랜만이야 이사쿠 군.”
이사쿠는 아직 학생일 때 그러던 것처럼 잣토 앞에 가깝게 서서 낮게 웃었다. 이 정도 거리가 아무렇지 않던 시절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이사쿠는 품 속에서 머뭇머뭇 편지를 한 통 꺼냈다. 구겨지고 접혀 온기와 체향이 밴 봉투를 보던 잣토는 소리내서 웃으며 그걸 받았다. 잣토는 웃음기가 채 못 가신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자네가 매번 전장을 돌고 나서 돌아가는 곳을 알았으면 좋겠네. 그럼 얼굴을 못 보더라도 답장을 놓고 갈 수 있을 테니까.”
알려드릴게요, 꼭 알려드릴게요.
중얼거리며 품으로 뛰어드는 몸은 아직도 소년 같은 태가 났고 예전보다 진한 약 냄새가 났다. 몇 가지 변한 점이 눈에 들어와도 이 감정만큼은 전혀 변하질 않았다. 안타까울 정도로 사랑스러운 온기가 품 안에 꽉 들어찼다.
잣토는 그 몸을 꼭 끌어안으면서, 순간 스치던 눈동자가 다시 5년 전처럼 빛나던 걸 떠올렸다. 잣토는 팔에 힘을 줬다. 품 안의 존재가 더 확고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가 뜨끈하게 젖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꽃길이 다 무슨 소용이냐.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곧 가장 가까운 극락인데. 잣토는 그 때에 비해 거칠어진 머리칼에 입을 맞추며 중얼거렸다.
꼭 알려줘야 해.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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