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가 왔다. 란타로가 보낸 편지였다. 제 추억을 떠올리는 걸 어찌 알았는지, 흰 종이 안에 빼곡한 글씨가 신통했다. 반가운 소식들을 읽어 내리던 와중, 헤이다유는 가슴 한 편이 푹 파인 느낌을 받아야 했다. 덴시치의 이름이 씌여 있었다. 덴시치가 탈주를 하거나 어딘가에 붙잡힌 것 같다는 소식이 도는데 걱정이 된다, 원래 그럴 성격이 못 되는데 이 쪽 지역에 갔다가 돌아오질 않는다기에 뭔가 아는 게 있는가 해서 묻는다는 내용이었다.
란타로는 졸업 후 학교의 양호선생으로 남아 졸업 한 선후배들이며 동기들의 소식을 모아다가 보내주곤 했다. 헤이다유가 덴시치가 몸 담던 성이며 지역을 알 수 있던 것도 어디까지나 란타로 덕이었다. 그 덕을 보던 것이 이렇게 돌아오는구나 싶어 목 울대가 쓰렸다. 헤이다유는 결국 몇 번이나 붓을 들었다가 놓다가만 했다. 한 글자도 못 쓴 흰 종이가 저를 비웃는 것 같았다. 그래, 좋으냐 이 미련한 놈아. 헤이다유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래. 기쁘다. 진심으로, 기쁘다.
덴시치는 할 일이 영 없었다. 매일 하는 일이라고는, 식사를 하고 방에 앉아 옛날을 기억하는 일 뿐이었다. 방에 몇 권 있던 서책은 진작에 물렸고, 의원이 지어 주던 독한 진통제는 슬슬 그 양이 줄었다. 상처는 생각보다 금방 나았다. 몸을 일으킬 적이나 걸음을 걸으려 할 때면 뻐근하고 욱신거리는 것이, 힘줄을 깊게 벤 것 같았다. 진통제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헤이다유 품에 누워 있는 일도 줄었다. 무엇보다도, 헤이다유는 얼굴을 잘 비치지 않게 되었다. 덴시치는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라진 장소에 제 핏자국이며 옷자락이 남았으니 성 측에서는 사망 처리를 할 지도 몰랐다. 최악의 경우에는 시체를 못 찾았다는 이유로 탈주했다는 죄를 덮어쓰는 것이지만, 다행히도 덴시치의 부모님은 꽤 지체가 있었다. 비록 탈주닌자로 처리가 된다고 한들 가족들이 핏물을 뒤집어 쓰진 않을 것이라는 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렇다면, 자신은 뭘 그리 걱정하고 있는가.
덴시치는 천천히 손장난을 쳤다. 시들해져가는 꽃잎이 손톱 아래 보드랍게 뭉개졌다. 헤이다유가 저를 내몰까봐서? 아니면 이렇게 살다 돌연 개죽음이라도 당할까 봐? 원래 닌자란 최악을 생각하고 행동하는 직업이고, 덴시치가 거기에 예외를 둔 적은 없었다. 비명횡사도, 시체가 조롱거리가 되는 것도 각오하고 살던 자신은 뭐가 그리 걱정되는 것일까.
덴시치는 억지로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좋은 생각을 하자. 덴시치는 여리한 꽃잎을 뭉개며 선배 생각을 했다. 1년이라는 아쉬운 시간 후에 졸업 해 버린 센조 선배에 대한 기억도 좋았지만, 내도록 저를 살펴준 건 우라카제 선배였다. 예습 좋아하고 고지식한 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아주 상냥했고 말이다. 어릴 때 부터 어디서 속이 상하거나 겁을 먹어 와서 혼자 시무룩해 있으면, 선배가 곧잘 달래주곤 했다. 한참 어릴 적엔 얼러 주며 사탕을 주었고, 나이가 좀 차고 나서는 곁에 앉아 차를 끓여 주며 얘기를 했다. 사키치나 같은 반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학창시절 내내 가장 가깝게 지낸 사람이리라.
이상하고도 우스운 일이다. 토나이에게 헤이다유 일로 곧잘 상담하던 것도, 지금까지 보름이 다 되도록 헤이다유에게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것도 같은 쿠로카도 덴시치라는 게 말이다. 그 때엔 그래도 네 얘기를 하는 게 덜 어려웠다. 졸업하던 그 날 이후가 지옥같았을 뿐이지. 덴시치는 풀썩 누워 천장만 바라보았다. 이렇게 가만히 보다 보면, 꼭 무너져 줄 것만 같은 흰 천장이었다. 무너져 줬으면 좋겠다 하고 한참을 생각하는데, 드르륵 소리가 났다. 덴시치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식사시간도 아닌 때에 이 방에 들어오는 건 한 사람밖에 없었다.
고집스레 천장만 바라보는 덴시치가 원망스러운 건지, 아니면 그냥 하루가 피곤한지 몰라도 깊은 한숨이 따라왔다. 네가 그런 안타까운 한숨을 쉴 자격이 있던가? 덴시치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것도 우습네 그래.
또 우스운 건 많았다. 예를 들면 저 팔 안의 온기가 눈물샘을 자극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 온기는 참 사람같아서 눈물이 났다. 혼자 갇혀있다 보니 별 게 다 서럽다 싶은 게 우습지 뭔가.
헤이다유는 그 자리에 가만 서서 덴시치를 보았다.
꼭 날개 꺾어 놓은 매 마냥 곧게 누워 하늘만 보는 모습에 란타로의 글자가 겹쳐져 보였다. 덴시치는 아직까지도 한 마디를 안 했다.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짜증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 목소리가 울리는 때는 울음소리에 섞일 때 뿐이었다. 덴시치는 밤에는 제 품에서 울다가 잠들고, 낮에는 멀뚱히 혼자 하루를 보냈다. 최근엔 그나마도 못 본 일이 잦았다. 헤이다유는 저도 모르게 불쑥 한 마디를 뱉았다. 스스로도 지레 놀랐지만, 이미 말이 입술을 떠난 이후였다.
"미안."
처음으로 덴시치는 헤이다유가 한 말에 반응했다.
개를 본 고양이처럼, 동공이 가늘어진 눈을 홉뜨고 이쪽을 노려보았다. 헤이다유는 말을 도로 주워 삼키고 싶었다. 덴시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홀로 서는 것도 편치 못한 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헤이다유는 그 어깨를 부축해주고 싶었지만, 곧 덴시치가 한 말에 움직일 수 없었다.
"뭐가?"
표독스럽지도, 독기가 서리지도 않은 담담한 어조가 칭칭 감긴 사슬을 쿡 조였다. 덴시치는 말끄러미 헤이다유의 눈을 보았다. 그 안에는 울분 비슷한 것이 담담하고 맑게도 들어 차 있었다. 헤이다유는 그것마저 곱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덴시치가 한번 더 문장을 반복했다.
"뭐가 미안하느냐고."
헤이다유는 아무 말도 꺼내질 못했다. 혀가 잘린 것 처럼 고요히 선 헤이다유를 보던 덴시치는 하 하고 웃었다. 미안? 뭐가 미안하지? 남의 힘줄 끊어다가 가둬 놓은 게, 아님 남의 학창시절을 시커멓게 얼룩져 놓은 게? 아니지, 또 미안할 일이 있지. '그 날'도 있지 않은가. 덴시치는 무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그 날'도 미안해?"
헤이다유는 정말 놀란 듯, 마른 입술만 달싹이다가 나가 버렸다.
결국 너는 나한테 미안할 일만 하면서 살지 않았던가? 덴시치는 벽에 기대 주저 앉았다. 스륵 풀린 다리와 함께 느슨해진 눈물샘도풀어졌다. 덴시치는 그 자리에 인형처럼 앉아 줄곧 생각했다. 흐른 눈물로 얼굴이 따갑게 트고, 노을이 져 밖이 어둑해졌어도 머릿 속 장면은 한 군데에 멈춰서 흐를 줄을 몰랐다.
그리고 그건 헤이다유도 마찬가지였다. 애써 묻어 둔 곳을 파헤쳐진 기억이 터진 둑을 넘듯 폭력적으로 몰아쳤다. 두 사람의 머릿속에 공평한 폭풍우가 몰아치고 강이 넘쳐 흘렀다.
그 와중에도 봄 내음이 나는 밖은 조용하고, 어둑한 밤은 흰 천장을 눈물보다 파랗게 물들였다.
슬프고도 다행인 일이었다.
짧음주의 진짜 짱 짧은듯. 근데 다음편을 위한 짧음이라....ㅠㅠㅠ모자른 내 실력으로는 이렇게라도 잘라서 사건을 분리할 수 밖에 없었다ㅏㅏㅏ으아아아아ㅏㅏ덴시치 미안해 사랑해...헤이다유도..누나가 아껴여 얘드라 비록 이런 걸 쓰지만 누나는 너네를 참 사랑해ㅠㅠㅠ다음편은 어쩔 수 없이 짱 길다는 게 좀 위안이 되네여 그래 내가 이 편을 짧게 쓴 건 다음편에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는 개뿔 자러 가야징..어..근데 다음 편.....어.....비번 걸어야되나...어...?